젠더, 사회 변방 넘어 중심의제로 성큼… 뉴스룸도 변할까

이젠 '젠더 시대'… 한겨레, 여성 전담기자 신설 등 새 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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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학생의 날을 맞아 교내 성폭력 실태를 고발하고 예방책을 촉구하는 ‘스쿨미투’ 집회가 서울 광화문에서 열렸다. 지난 4월 서울 용화여고에서 ‘미투(MeToo)’에 동참하는 메모장이 붙은 이래 처음으로 열린 학생들의 장외 집회였다. 이날 집회 참가자들은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최 측 추산 참가자가 250여명에 불과한 작은 집회였지만 신문·방송·통신 등 다수의 언론이 이날 집회 소식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지난 1월 한 검사의 법조계 성폭력 폭로를 시작으로 국내에서도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이래 많은 일이 일어났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성폭행 사건과 무죄 판결이 크게 논란이 됐고, 홍대 ‘몰카’ 사건을 계기로 불법촬영 편파 수사를 규탄하는 ‘혜화역 시위’ 등과 ‘탈 코르셋’ 열풍도 잇따랐다. 젠더이슈는 이제 주변부를 넘어 사회 중심 의제로 떠올랐다.


동시에 페미니즘은 대중적인 ‘아이템’이기도 하다. 페미니즘 열풍을 일으킨 소설 ‘82년생 김지영’은 무려 70만 부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성희롱 문제 등 젠더이슈를 정면으로 다룬 CJ E&M 스튜디오온스타일의 웹드라마 ‘좀 예민해도 괜찮아’는 한 달 만에 누적 조회 수 2000만 뷰를 기록하며 폭발적인 호응을 얻었다.


이 같은 사회 전반의 변화는 자연히 뉴스룸 내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3일 서강대에서 한국여성커뮤니케이션학회(여성컴학회) 주최로 열린 ‘성평등한 미디어 공론장을 위한 언론환경 개선’ 세미나에서 김균미 한국여기자협회장은 “미투나 여성혐오, 페미니즘에 대해 ‘전보다는 이슈가 된다’는 게 뉴스룸의 공통된 생각”이라며 “여성 이슈가 나와 우리, 후세의 문제이자 사회적 문제라는 공감대가 분명 있고, 남녀를 떠나 이 이슈를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존에는 여성가족부 출입 기자가 여성 관련 이슈를 챙기고 집회·시위 등은 사건팀 기자가 챙기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다보니 큰 흐름과 의미를 읽지 못하고 피상적으로만 보도한다는 지적이 안팎에서 제기됐다. 기사를 누가 쓰고 데스킹을 누가 보느냐에 따라 같은 매체 안에서도 논조 차이가 확연해지는 문제도 나타났다. 게다가 젠더이슈가 정치·경제·사회·교육·문화 전반에 걸쳐 있어 여가부 출입 기자가 홀로 담당하기엔 한계가 분명했다.


한겨레가 최근 조직개편에서 젠더팀 신설을 검토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출입처의 한계를 넘어서 젠더 관련 현안을 다룰 팀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일단 이번 조직개편에서 팀 신설은 보류됐지만, 젠더 이슈를 전담하는 기자를 배치함으로써 가능성은 열어둔 상태다.


KBS는 임의 조직이긴 하나 실제로 팀을 꾸려 일정 기간 운영하기도 했다. 지난 7월 여성 이슈를 심도 있게 다룰 필요가 있다는 사회1부장의 제안에 따라 사회1부와 사회2부 소속 기자 4명이 뭉친 젠더팀이 만들어졌다. 조직도 상엔 존재하지 않는 임시 조직이었지만 의욕은 높았다. 우선 여성학자, 언론학자, 언론시민단체 등 전문가 그룹에 자문을 구해 젠더 보도 관련 가이드라인 초안을 만들었다.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시위, 안희정 무죄 선고 규탄 집회 등 젠더이슈 집회가 잇따라 열린 지난 8월엔 집회 취재를 전담해 참가자들의 요구를 깊이 있게 전달하는 데 중점을 뒀다. 9월에는 미투 운동을 계기로 떠오른 중요한 입법 과제들을 소개하는 ‘법이 없다’ 시리즈를 연속 5회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5년차 이하의 기자들이 출입처 업무를 소화하면서 젠더 기획까지 병행하는 것은 무리였다. 출입처 중심의 취재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한계가 명확하다는 판단에 따라 2개월여 만인 9월 말 해산했다. 여가부 출입이면서 젠더팀 소속이었던 김채린 기자는 “여러 명의 기자가 책임감을 가지고 젠더 이슈를 함께 고민하다보니 아이템 사전 취재나 발제가 한결 수월했다”면서도 “하지만 젠더팀 업무가 각자의 출입처 취재 때문에 자꾸 후순위로 밀리는 등 기존 업무 체계 속에서 한계가 명확했다”고 말했다. KBS 기자협회 여성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김 기자는 지난 9월 초 보도국 국장, 주간단이 참석한 보도위원회에서 KBS 젠더 보도 문제를 안건으로 발제하고 “향후 조직개편 시, 출입처 중심 체계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소수자 이슈를 전담하는 취재팀을 만들 것”을 검토해 달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한겨레나 KBS처럼 젠더팀 신설을 검토했거나 시도한 경우는 드문 사례다. 대다수 언론사들이 젠더이슈를 전담할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검토조차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투 이후 뉴스룸의 분위기가 젠더 문제에 대해 민감해진 것만큼은 공통된 사실로 보인다. 임아영 경향신문 지회장은 “여기자들이 많아지니까 위에서도 당연히 젠더문제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고 후배들에게 역으로 물어보는 경우도 있다”며 “그래도 여전히 성차별적인 표현들이 무심코 쓰여서 여성 기자 뿐 아니라 남성 기자들이 문제제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중앙일보 한 기자는 “전담 팀이 따로 있지는 않지만 젠더문제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발제하는 기자들이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뉴스룸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에 관여하는 간부들이 중년 엘리트 남성 중심이어서 여성 등 소수자 이슈가 덜 중요하게 취급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뉴스룸 내의 ‘기울어진 추’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젠더이슈를 여성 기자들에게만 맡겨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있다. 여성 기자들이 젠더이슈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면 “왜 편을 가르냐”, “다른 현안도 많은데 젠더만 중요하냐” 같은 싸늘한 시선을 받기도 한다. 기사에 달리는 악성 댓글도 기자들을 위축시킨다. 3일 여성컴학회 세미나에서 정은령 서울대 팩트체크 센터장은 “여기자에게 젠더 문제를 맡기며 주변화 하는 건 아닌지 의심도 든다”며 “‘메갈기자’로 불리며 트라우마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인 만큼 이 문제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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