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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 봬도 공무수행 중입니다”

[글로벌 리포트 | 핀란드] 최원석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교 미디어교육 석사과정

최원석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교 미디어교육 석사과정2018.10.10 14:31:56

저는 소주입니다. 인천공항을 떠나 유럽으로 가는 핀에어 수하물 칸에 타고 있습니다. 어디 가냐고요? 교육청 지원을 받아 연수 떠나는 교장 선생님들과 함께 헬싱키로 가고 있지요. 몇 년 전 구의원님들과 동행할 때는 겨울이었는데, 이번에는 화창한 가을에 연수하게 되었습니다. 어제 한껏 들뜬 주인 선생님께서 고추장, 라면과 함께 저를 캐리어에 넣으셨죠. 여권은 없지만 이래 봬도 공무 수행 경력 수십 년째입니다.


아, 잘 아시겠지만 저는 흥이 넘치는 음료입니다. 모처럼 외국에 나온 주인님 기분을 한껏 올려드릴 수 있죠. 이번 연수에서도 제 역할이 아주 중요하겠더라고요. 사흘 일정인데 하루에 꼬박꼬박 두 군데씩 기관 방문을 해야 한다고 하니. 일정 담당자가 누군지 참 눈치 없군요. 가뜩이나 나랏일 바쁜 주인님들을 몇 시간씩 붙잡아두겠다니 말이 됩니까. 여유로운 북유럽 스타일대로 하루 절반은 비워두는 센스가 없네요.


물론 연수와 공무 일정이 아무리 빡빡해도 제 할 일은 다 합니다. 북유럽처럼 물가 비싼 지역에서도 저는 일단 하루 두 번씩 주인님 목을 축입니다. 점심에는 중국 식당에서, 저녁에는 호텔 객실에서. 한국에서 온 소주가 어떻게 헬싱키 식당에 들어가냐고요? 에이, 잘 아시면서. 주인님은 일단 무미건조한 물을 버리고 생수병에 저를 옮기십니다. 식당에 들어가면 다른 음료를 몇 병 시키죠. 적당히 음식이 나오면, 무릎 사이에 끼고 있던 생수병을 테이블에 조용히 올리곤 물컵에 저를 담아 섭취하십니다. 눈치 빠른 종업원이 위생법 운운 경고하면 어떻게 하냐고요? 어차피 한번 보고 말 사이니 조금 서둘러 드시면 그만입니다. 헬싱키에서 스톡홀름 가는 크루즈선에서는 맥주와 저를 한 잔에 섞어주셨어요. 폭탄주로 업그레이드된 그 날, 비밀스레 발틱해 노을을 바라보며 공무원 역량 강화에 일조하던 그 경험은 더없이 보람차더군요.


이런, 너무 제 이야기만 했나요? 오랜 동료 고추장과 라면의 활약도 소개합니다. 저희는 한국보다 해외에서 더 끈끈한 우정을 쌓아 왔습니다. 연어구이나 순록고기도 한두 번이지, 입에 안 맞는 음식보단 역시 저희 한식(韓食)이 최고 아니겠어요? 고추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어떤 음식이든 우리맛으로 바꾸는 재주를 지녔고, 라면 또한 어떤 상차림이든 풍성하게 만드는 전천후 실력자죠. 특히 라면과 저는 조석으로 여러 주인님의 컨디션 조절에 큰 역할을 해왔다고 자부합니다. 다만 제 친구들을 드시려거든, 남은 육신을 호텔 객실 변기에 홀로 버려두는 일만은 참아주세요. 객실 청소 직원이 불어 터진 면발 몰골에 경악했다는 소문이 덴마크에서 돌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저희 셋이 핀란드 삼겹살과 손잡고 일하다가 큰일을 치른 적도 있죠. 헬싱키 어느 호텔에서 있던 일인데, 그날은 그 몹쓸 경보가 울리기 전까지 모든 일이 순조로웠습니다. 주인님들은 원활한 공무 수행을 위해 마트에 갔다가 삼겹살을 발견하곤 정말 기뻐하셨어요. 저희도 북유럽 청정 돈육과 협력할 생각에 너무도 설렜고요. 주인님들께서 객실 다리미에 알루미늄 호일을 깔고 삼겹살을 올리실 때, 열 감지기 위치만 한 번 더 확인하셨어도…. 결국 호텔 직원이 올라와 항의하면서 저희는 공무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빠듯한 경비 아끼는 방향으로 단합을 도모했을 뿐인데, 호텔에서 주인님들께 너무 박하게 굴더군요.


교육이며 복지 같은 골치 아픈 주제로 북유럽에 오신다면, 앞으로도 저희를 챙겨 주세요. 에스토니아나 스웨덴에서 쉽게 김치를 구하고, 심지어 핀란드 산타클로스 마을에서도 불닭볶음면을 살 수 있는 시대라지만, 어디 한국에서 직접 공수한 소주와 라면 맛이 나겠습니까? 해외연수는 다 맘 편히 놀다 오는 것이라며 말이 많지만, 시차 적응하며 공무 수행하는 주인님들 노고를 저희가 잘 압니다. 어디든 저를 데리고 가주시는 배려 덕분에 올해도 이렇게 세계 곳곳을 돌아봅니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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