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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초월을 기대하며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2018.05.16 16:45:05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총국장

“어디 가서 전문가라고 말하기가 두렵다.”


북한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중국의 한 대학교수가 최근 기자에게 한 말이다. 한반도 정세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면서 많은 질문을 받고 있지만, 상상의 범위를 뛰어넘어 일어나고 있는 현상들에 대해 제대로 된 대답을 못해주고 있다고 털어놨다. 섣부른 예측을 내놓았다가 빗나가기라도 하는 날이면 망신은 물론, 전문가로서 쌓아올린 권위에도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니 답변에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북한발 뉴스는 범위를 북·중 관계로만 국한해서 봐도 마찬가지다. 불과 40여일 터울로 이어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두 차례 방중이 모두 그랬다. 필자가 이 원고를 쓰고 있는 지금도 김정은의 핵심 측근인 박태성 노동당 부위원장이 베이징에 와 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모처럼 보낸 특사조차 김정은을 못 만나고 돌아온 게 불과 6개월 전 일이다.


이럴 때 다시 사람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게 ‘특수관계’론이다. 북한과 중국 사이에는 일반적인 국가 대 국가의 관계와는 다른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흔히 등장하는 말이 ‘순망치한(脣亡齒寒)’이다. 특수 관계를 최대한 강조할 땐 ‘혈맹’이란 말까지 동원된다. 그와 대비되는 관점이 ‘국가 대 국가’로서의 ‘정상관계’론이다. 시대 변천과 양국 지도부의 세대 교체에 따라 북·중 관계의 성격도 이미 바뀌었다는 의미다. 시진핑과 김정은이 각각 집권하고 난 뒤의 양국 관계 흐름은 ‘특수 관계’가 이미 종지부를 찍었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김정은의 전격적인 방중은 이런 가운데 일어났다. 온 시선이 김정은의 입과 트럼프의 트윗과 문재인의 운전대에 쏠려 있던 3월26일, 그는 홀연히 베이징에 나타났다. 처음 확인된 것은 전용열차가 나타났다는 사실 뿐 그 안에 누가 탔는지에 대해서는 온갖 추측이 범람했다.  


한국 언론의 보도 중엔 김여정일 가능성에 무게를 둔 기사가 많았다. 김정은이 김여정을 특사로 보냈다고 단정한 매체도 있었다. 원인의 상당 부분은 정부가 제공한 것이라 본다. 베이징 도착 첫날 청와대의 한 당국자는 “북·중 관계가 이토록 악화된 상황에서 김정은이 곧장 방중하기 보다는 김여정을 특사로 보내 한국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향후 정상회담 일정 등을 조율할 가능성이 있다”며 “북한이 주장하는 ‘정상국가’로서의 로직과 유사한 흐름”이라고도 했다. 베이징에 주재하는 당국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는 필자의 느낌, 혹은 촉(觸)과는 다른 것이었다. 초호화 의전과 극도로 삼엄한 경비로 볼 때 ‘김정은이 아닐 가능성’을 떠올리기 힘들었다. 북한 방문단의 차량 행렬은 언젠가 베이징 한복판 창안제(長安街)에서 목격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그것과 판박이였다. 정부는 이튿날 판단을 정정했다. 그런 소동을 뒤로하고 돌아간 김정은이 불과 40여일 만에 다롄(大連)에 나타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일을 지켜본 전문가는 “북·중 관계란 심연(深淵)의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고 했다.


과연 ‘특수관계’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란 속담을 인용하며 “북·중 관계란 원래 그런 것이었냐”고 또 다른 학자에게 물었다. 북한 전문가가 아닌, 국제관계 전반을 연구하는 학자인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더도 덜도 아닌 “양측의 국가 이익에 대한 판단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란 설명이었다. 동북아의 대전환을 각자의 방식대로 꿈꾸고 있는 지금, 북한과 중국 양측 모두 벌어진 틈을 청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전광석화처럼 일을 치르는 방식이 과격했을 뿐, 만남 자체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북·중 관계의 변화에 비하면 북미 관계의 변화가 더 크고 극적이지 않냐”고 반문했다. 그의 말 속에는 중요한 시사점이 들어있다. 국가 이익에 대한 판단이 맞아 떨어지는 지점만 찾아낸다면 훨씬 더 큰 변화, 훨씬 더 극적이고 놀랄만한 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베이징에서의 그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진정한 ‘상상초월’이 과연 싱가포르에서 일어날지 숨죽이며 지켜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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