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하면 욕설에 폭행, 성희롱까지…언론계 갑질주의보

술 마시다가 폭언하고, 낙종했다고 욕설하고
신체적 약점 비꼬거나 가정사 들먹이며 조롱
음담패설 등 성차별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잘못 주입된 군대문화 자성하고 바꿔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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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회식 하지 마라. 젊은 직원들도 돈도 있고 친구도 있다. 없는 건, 당신이 뺏고 있는 시간뿐이다. ‘내가 누군 줄 알아’ 하지 마라. 자아는 스스로 탐구해라. ‘우리 때는 말야’ 하지 마라. 당신 때였으니까 그 학점 그 스펙으로 취업한 거다. 술자리에서 여직원을 은근슬쩍 만지고는 술 핑계 대지 마라. 부하 여직원의 상사에 대한 의례적 미소를 곡해하지 마라. 내 인생에 이런 감정이 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용기 내지 마라. 제발, 제발 용기 내지 마라.”


올 초 문유석 판사가 중앙일보에 내놓은 칼럼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화제로 떠올랐다. 한국 사회의 고질병인 상하 문화와 성차별을 지적한 기사를 3000여명이 넘는 네티즌이 공유했다. 군대문화로 대변되는 억압적인 조직 환경에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한 것이다.

폭언에 시달리는 막내 기자들
위계질서가 엄격한 언론계도 강압적인 조직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젊은 기자를 중심으로 개인주의를 표방하며 개선되고 있는 모양새지만 상하 문화는 여전하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강요받고, 부당한 지시에도 순응해야하는 구조. 갓 입사한 기자들이 수습을 떼지도 않고 줄줄이 퇴사하는 이유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1~2년차 때 폭우가 내리는 데 ‘엎드려 뻗치기’ 자세를 시키고, 낙종 심하다고 회식 때 일으켜 세워서 심한 욕설을 들은 경험을 잊을 수 없다”고 회상했다.


▲언론계에서는 엄격한 위계 서열의 압박과 언어폭력, 신체적 폭행, 성희롱 등으로 이어지는 부당한 대우에 젊은 기자들 중심으로 퇴사를 결정하는 일이 늘고 있다. 인력 채용을 늘리고 기존의 도제식 교육체계의 전면적인 개편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개 언론사 시험에 합격한 수습기자는 경찰서를 돌며 취재하는 ‘사스마리’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사수 선배로부터 욕설과 폭언을 듣기 일쑤다. 한 종편의 기자는 “타사에 물을 먹었다는 이유로 한 시간 넘게 인신공격적인 발언을 들어야 했다. 2시간마다 보고를 해야 해서 잠을 못 잔 상태가 반복됐는데, 그보다 선배의 억압적인 행동과 말이 더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또 다른 지상파의 기자는 “잠깐 잠이 들어서 저녁 취재원 약속에 지각을 하게 됐다. 놀라서 선배한테 전화했는데 당시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욕설을 몰아서 들은 것 같다”며 “하리꼬미(경찰서에서 숙식하면서 취재) 제도가 꼭 필요한 건지에 대한 언론사들의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한 일간지에서는 부장의 폭언에 못 견딘 막내 기자가 퇴사한 일이 일어났다. 해당 신문사의 한 기자는 “연차가 낮은 기자라서 문제제기를 할 힘이 있었겠나. 스스로 지쳐서 나갔다가 선배들의 권유로 올해 초 다시 사회부로 복직된 걸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폭언을 한 부장은 사내에서 학력 등과 관련한 비하 발언을 일삼아온 것으로 전해졌다. 사건이 사장에게까지 보고되며 해당 부서가 해체되고, 가해자로 지목된 부장은 다른 부서 임원으로 부임됐다.


최근에는 노조위원장이 술을 마시던 중 후배에게 폭언해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 해당 언론사는 위원장 선거를 치른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새로 선거를 하게 됐다. 사내의 한 기자는 “이번 일 뿐만 아니라 이전에도 취중에 폭언해 구두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 이번 사건이 불거지며 그간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문제를 제기하게 됐다”며 “위원장직 사퇴는 어떠한 인사보다 더 강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폭행과 성희롱까지…갈수록 커지는 폭력
언어폭력에 익숙해지면 신체적 폭행도 스스럼없이 행하기 마련이다. 지난해 12월 한 민영뉴스통신사 국회 출입기자는 후배 기자의 정강이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등을 때리는 폭력을 가했다. 폭행을 당한 기자가 괴로움을 호소하며 회사를 그만 두자, 동기와 선후배들은 (가해자로 지목된 기자와 관련해) “후배의 신체적인 약점을 비꼬거나 가정사를 들먹이며 조롱하는 행태를 지속해왔다. 폭언과 인격모독에 지쳐 그간 정당팀을 떠난 기자도 여럿”이라며 파면을 촉구했다. 결국 해당 기자는 사표를 냈고, 후배 기자는 복직했다.



그 해 또 다른 일간지에서는 한 사회부 기자가 술자리에서 후배 기자의 다리를 만지는 등의 성추행으로 물의를 빚는 일이 발생했다. 사건이 알려지자 그는 즉각 사표를 냈다. 남성 위주의 문화가 고착화된 언론계에서 술자리에서의 행동은 위험 수위를 넘나들기 일쑤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선배 세대만 해도 노래방에서 블루스를 추는 등의 스킨십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라며 “음담패설 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해 외모를 비하하는 방식으로 성차별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문제는 이를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것”이라며 “문제제기를 하려고 해도 농담으로 치부해버릴까 조심스럽다”고 고백했다.


“아무래도 정규직인 기자보다 훨씬 심하죠. 하소연할 곳도 없잖아요. 말한다고 해도 비정규직 직원만 피해를 입을 게 뻔하니까요.” 언론사 내 비정규직의 경우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에 더욱 취약하다. 한 지상파의 교양국 작가는 “종편 감독이 아무렇지 않게 후배 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리를 만지는 성추행 장면을 목격한 적이 있다. CP에게 문제제기를 해도 감독에게 꿈쩍 못했다”며 “불쾌하게 손을 잡혀도 싫다는 표현을 못할 정도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힘들었다”고 호소했다.


계약직 아나운서나 캐스터 등도 성희롱 피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PD 등 제작진의 말을 잘 들어야 프로그램을 계속 진행할 수 있어 부당한 경험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지역방송사의 한 기자는 “예전에 케이블 방송국에서 일할 당시 차안에서 캐스터를 노골적으로 추행하는 PD 선배의 모습을 목격한 적이 있다”며 “막내 연차라 알릴 수도 없는 처지라, ‘일단 여기에서 빨리 나가서 다른 곳으로 이직해야 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개 언론계에서 여성 언론인들은 조직 문화에 순응할수록, 남성보다 더 남성적일수록 능력을 인정받는다. 여성으로서 겪는 불이익에도 쿨하게 넘겨야 좋은 인재로 평가되는 것이다. 한 종편의 기자는 “간혹 여성 간부들조차 이러한 남성 위주의 조직 문화를 후배들에게 종용을 하는 모습을 볼 때면 스스로 유리천장을 만드는 것 같아 실망스럽다”며 “후배 기자들이 남녀 차별 없이 훌륭한 언론인으로 성장하려면 선배들의 변화와 용기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홍보실 직원에 ‘갑질’하기도
언론계의 악폐는 취재원과의 만남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지난해 청탁금지법(김영란법)이 시행된 후로 접대 그 자체는 줄고 있지만, 언론인들이 홍보실 직원들에게 갑으로 존재하는 건 여전하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경제부를 출입할 당시 막내급으로 보이는 한 타사 기자가 홍보 직원을 종처럼 부리는 걸 보고 놀랐다. 선배 기자들이 소위 ‘갑질’을 행사하는 걸 그대로 보고 배운 것 같다”며 “언론계 내·외부에서 끊어내지 못하고 있는 갑의 고리를 청산하기 위해 언론인 스스로의 자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현 YTN 기자는 “언론사의 군대문화는 기본적으로 도제식 교육이 가져다주는 폐해”라며 “수습기자 교육은 일방적이고 구시대적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아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의 인식의 차가 큰 상태에서 진행된다. 여기서 생기는 군대식 억압문화가 초기 조직생활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주입되면서, 시대가 변해도 언론사의 조직문화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남호 MBC 기자는 “워낙에 인력을 적게 뽑다 보니 ‘강단’ 따위를 요구하게 되고 고생의 공유, 전파를 낭만인양 강요하게 되는 것”이라며 신규 채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총 쏘고 받아내는 것 이상의 조직 어젠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민주적인 편집회의를 도입해 자발적인 참여를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이진우 기자 jw85@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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