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해녀와의 동행,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1년간 '제주잠녀' 취재한 고미 제민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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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 제민일보 기자.

2005년 6월2일 제민일보가 ‘대하기획 제주잠(해)녀’를 시작했을 때 잠녀기획팀의 목표는 유네스코 등재였다. 그때만 해도 3~4년이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거라고 모두들 생각했다. 그러나 자그마치 11년 후인 지난해 11월30일에야 제주해녀문화는 유네스코 인류무형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 지난한 시간 동안 제민일보 기자들은 해녀와 해녀문화를 꾸준히 조명해왔다.


지난달 21일 제주해녀 기획으로 팀원들과 함께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고미 제민일보 기자는 그 중에서도 11년간 기획을 꾸준히 이어온 유일한 기자다. 고 기자는 “기획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10년차 기자로 팀원들 중 가장 막내였다. 하지만 어느덧 만으로 20년을 채웠다”면서 “제주에서 나고 자랐지만 해녀에 대해서 잘 몰라 ‘정 모르겠으면 바다에라도 들어가겠다’고 출사표를 던졌는데, 그게 벌써 11년이 지났다”고 말했다.


그와 팀원들이 2005년 제주해녀에 주목하기 시작한 건 사라지는 해녀와 해녀문화를 어떻게든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1970~80년대부터 언론에서는 꾸준히 해녀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보도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는 곳은 어디도 없었다. 고미 기자 등은 해녀를 지키기 위해 11년 동안 다양한 방식으로 해녀를 조명했다. 제주의 역사와 문화의 상징인 해녀의 기록을 정리하고 그들의 문화에 집중했다. 등재해야 할 문화 목록을 만들고, 어떤 해녀 정책을 펼쳐야 하는지 청사진을 제시했다.


▲고미 기자가 제주 해녀들을 취재하는 모습.

물론 작업은 쉽지 않았다. 해녀들을 취재하기 위해선 주중, 주말을 가리지 않고 취재를 나가야 했다. 차가 소금기로 삭을 정도로 바닷가에서 해녀들을 기다렸고, 사투리가 심해 알아듣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다. 얼굴이나 이름이 노출되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해녀들을 설득하는 것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힘든 건 긴 시간 기획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5~6년 지나니 회사에서도 ‘언제까지 할거야?’라고 묻는 사람이 많아지더라고요. 답이 안 보이기도 하고, 너 혼자 한다고 되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부담이 많이 됐어요.”


그럼에도 고 기자는 그만둘 수 없었다. 일단 시작했으니 목표를 이뤄야겠다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게다가 매회 기획을 스크랩하는 독자들과 해녀 자료를 필요로 하는 제주학연구센터 등의 요청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또 취재를 하며 그는 해녀가 단순히 물속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기간 여성 중심 공동체를 형성해 온 역사의 증인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해산물을 많이 따지 못한 어린 해녀나 할머니들의 망사리에 그들이 목숨을 걸고 채취한 해산물을 한 움큼씩 나눠주는 ‘개석’ 전통이나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거나 쉬는 ‘불턱’이라는 공간 등 해녀들의 공동체 문화를 계속해 소개할 필요성을 느꼈어요. 또 해녀가 가장 처음 외국에 소개됐을 때 젠더적으로 자립심 강한 여자로 묘사됐듯 전문직 여성의 초창기 모델이었던 것도 강조했죠. 그러다보니 해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점점 늘어가고 자기 엄마가 해녀라며 소개해달라는 요청도 많이 들어왔어요. 참 뿌듯했죠.”


▲고미 기자가 해녀들을 취재하는 모습.


고 기자 역시 해녀의 손녀이자 딸이었다. 외할머니는 전문적으로 물질을 했고 어머니도 물질의 기초까진 배웠던 분이었다. 그는 물질을 해본 적은 없지만 기자 인생 절반을 해녀와 함께 했다. 만삭의 몸으로 끝까지, 출산 후 복귀해 맨 처음 취재한 것도 해녀였다. 어촌계 100개를 돌다 어느새 소라 까기의 달인이 됐고 해녀문화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해 한국학 대학원까지 다녔다.


“해녀가 나를 많이 바꿨어요. 그래서 유네스코에 해녀문화가 등재된 후에도 마침표를 찍었다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첫 목표는 달성했지만 이후에도 해녀문화는 꾸준히 지켜야 하기 때문이에요.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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