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도라'와 '임을 위한 행진곡'

[스페셜리스트 | 문화] 김빛이라 KB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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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빛이라 KBS 기자

어떤 영화, 어떤 장면을 봐도 몰입이 되지 않던 요즘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따라가기도 바쁜데, 팝콘을 들고 극장을 찾을 새가 어디 있으랴. 치맥을 준비해놓고 뉴스시간을 기다리는 이들이 늘고, ‘극장’보다 ‘광장’을 먼저 찾는 게 주말의 풍경이 됐다. 영화 시사회장에서 스치는 기자들과 영화인들은 “얼른 시국이 진정되야죠”로 인사를 시작하고, 배우와 감독들의 인터뷰는 “흥행 라이벌, ‘시국’을 이길 수가 없네요”로 허탈한 마무리를 하곤 한다.


그러다 ‘판도라’를 봤다. 4년 전에 쓰여졌다는 시나리오는 지금 와서 보면 ‘예언서’에 가깝다.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실세’ 총리는 정보를 독점했고, 잇속을 계산하느라 공무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원전폭발을 막을 몇 번의 골든타임은 지나가고 만다. 방사능이 유출된 후엔 “대피 메뉴얼이라는 게 있을 것 아닙니까”라는 대통령의 물음에 “그런 건 없습니다”라는 단호한 답이 돌아온다.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에 국민들은 울분을 터트린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 귀에 익숙한 듯한 대사는 놀랍고 섬뜩하다.


자로 잰 듯 현실과 꼭 닮은 이 영화는 제작부터 개봉까지 무려 4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정권 말기에나 개봉할 수 있을 거란 예측을 뒤엎고, ‘최순실 게이트’와 맞물려 그야말로 ‘시국영화’ 장르의 신호탄을 일찌감치 쏘게 되면서, 관객들을 꽤 빨리 만나게 됐다. 사회 고발 영화들이 유독 투자받기가 쉽지 않은 환경에서 용케도 촬영을 마쳐뒀던 ‘판도라’는 그야말로 천운을 탄 것 아니냐는 게 영화판의 슬픈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지금 광주에서 한창 촬영 중인 영화 ‘임을 위한 행진곡’에 눈길이 간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 평범한 시민들이 겪어야했던 고통을 다루는 영화. 10여년 전부터 구상했던 이 시나리오는 3년 전 정부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으며 영화화가 될 기회를 얻었지만, 지금껏 대형 투자사를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배우들은 출연료 없이, 제작진들은 재능기부 형태로 모여들어 30% 정도 촬영이 진행된 상황에서 제작비는 바닥났다. 그러자 ‘큰 손’ 투자자 대신 다수의 ‘시민’들이 제작비를 감당해내기 시작했다. 최근 인터넷 펀딩 프로젝트를 통해 영화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수백 명의 네티즌들의 십시일반 후원이 몰려들어 촬영이 재개됐다.


“처음부터 대기업의 투자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시작했어요. 그래도 완성을 해야겠단 생각뿐이었죠.” 10년 넘게 간직했던 시나리오를 이번엔 꼭 영화로 만들겠단 의지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촬영을 시작하게 했다고 감독은 말했다. 결국 사회를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 소중한 가치를 논하고 있기에 정권을 정조준하고 사회를 고발하는 영화들은 오늘날에도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또 그 희망을 아는 국민들이 있기에 영화는 결코 멈추지 않고 나아갈 것이다.


물론 상상력의 결실인 영화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영화인들에게도 관객들에게도 생각할수록 슬픈 일이다. 영화 ‘판도라’ 시사회를 마친 뒤, “현 시국과 맞닿은 부분이 있어 관객들이 외려 피로감을 느끼지 않을까”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배우 김남길은 “영화는 그 안에서 희망을 볼 수 있고, 그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다는 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과연 그렇다. 절망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는 이들에겐 해피엔딩을 논하고 꿈꿔볼 수 있는 미래가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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