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외교안보도 손 떼야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역사는 혼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13년 7월 1일 제20차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이 열리고 있던 브루나이에서 윤병세 외교장관이 내뱉은 발언이다. 윤 외교장관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상과의 양자회담에서 “역사문제는 존중하면서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한 개인, 한 민족의 영혼이 다치는 결과를 초래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한일 외교장관이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아베 정권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촉구한다는 차원이라고는 하지만 공식 외교 석상에서 쉽게 튀어나올 수 있는 메시지가 아니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하고 있던 내외신 기자들은 이 생경한 발언이 어떤 맥락에서 외교 멘트로 준비됐는 지 전혀 몰랐다.
 

우연의 일치일까. 윤 장관의 이 발언이 나온 시기를 전후해 박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틈만 나면 “역사는 혼이다”는 주장을 펼쳤다. 지난 2015년 국정교과서 논란이 터졌을 때는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는 업그레이드 버전까지 내놓았다.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파문이 커지면서 이 발언들의 원출처가 의심을 받고 있다. 최씨가 아바타(박 대통령)의 입을 빌려 국정 곳곳에 개입한 흔적이라는 의혹이 나온다. 아무리 봐도 멘트 전체에서 최씨가 몸담고 있는 사이비 종교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얘기다.
 

한때 외교부를 출입했던 기자로서 윤 장관의 “역사는 혼” 발언도 최씨의 ‘빨간펜’을 거쳐 나왔다고 의심하고 싶지는 않다. 윤 장관이 박 대통령의 코드에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한 결과쯤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4년간 한국 외교에서 “역사는 혼”이라는 주장처럼 뭔가 억지스런 장면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국가 간 외교에는 역사적 맥락이 존재하는데 그 맥락을 무시한 돌출적 행태가 심심찮게 벌어졌다.
 

▲8일 오전 박근혜 대통령이 정세균 국회의장과 정국 해법을 논의하기 위해 국회 본관에 들어서자 야당의원들이 손피켓을 들고 시위를 하고 있다. 뉴시스

이미 박 대통령의 통일대박론을 담은 2014년 독일 드레스덴 연설문의 경우 최씨가 사전에 받아보고 수정했다는 증거가 나온 상황이다. 개성공단 폐쇄과정도 상식적인 정책 결정 과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통일부 실무자도 전날까지 몰랐고 입주 기업인들은 폐쇄 당일에야 통보받았다. 한일 위안부 협정도 난데없기는 마찬가지다. 해외 동포들까지 힘을 합쳐 일본을 압박하고 있던 시점에 정부가 갑자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일본과 타협해버렸다. 일본군 만행에 피눈물을 흘렸던 할머니들 가슴에 다시 대못을 박아놓고는 누구하나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하지 않았다.
 

사드(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도 안보상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정부가 제대로 공론화도 거치지 않고 기습적으로 배치 결정을 내려 혼란만 키웠다. 한반도 주변 환경과 우리의 국익을 철저히 따져서 결정해야 하는 데도 뭔가에 쫓기 듯 해치워버렸다. 미르·K스포츠 재단 인허가 절차를 단 하루만에 끝낸 것처럼 사드도 그렇게 후다닥 끝내려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정치권 일각, 특히 친박계를 중심으로 최순실 정국 수습을 위해 박 대통령이 외치를, 거국중립내각 총리가 내치를 맡는 방안이 거론되는 모양이다. 박 대통령도 김병준 총리 내정자를 지명하며 이같은 구도를 내심 원하는 것 같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가장 시급히 손을 떼야할 영역이 바로 외교안보 분야다. 합리성이 심각하게 결여된 사람의 손에 국가 안위를 맡겼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피해는 이미 입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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