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자(韓非子)가 '김영란법'을 말한다

[스페셜리스트 | 금융]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차장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차장

중국 한비자가 집대성한 법가(法家)는 사회적 관계성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됐다. 인간에게는 본질적으로 사리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어 그대로 두면 공익을 편취해 나라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봤다. 나라의 안정과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선 상과 벌로 백성과 신하들의 탐욕을 제어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관리를 독려하고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이며 악과 위험을 물리치는 데 형벌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제자백가의 한 줄기에 불과했던 법가는 진나라의 통치 이념으로 전격 등용돼 꽃을 피우게 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법이 공포되자 아우성이었다. 혹자는 칭찬하고, 혹자는 비난했다. 둘다 잡아다 엄벌에 처하자 말들이 사라졌다. 길에 떨어진 물건조차 줍는 사람이 없어졌으며, 산에는 도적이 사라졌다.” 진시황은 이런 사회적 안정을 기반으로 중국 최초로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법가는 인성에 대한 불신에 기반을 둔 데다 진의 통치술은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을 품었다. 법치의 의미인 ‘법의 지배(rule of law)’보다는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추구했기에 진의 멸망과 함께 주류에서 밀렸고, 법가 사상가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대한민국의 ‘청렴 실험’으로 불리는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 등에 관한 법)도 사회적 관계를 규정하는 법으로 그 이면에는 공적분야 전반에 대한 불신이 깔려 있다. “신하는 자신에게 해가 되고 나라에 이익이 되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법가의 사상과 맞닿아 있다.


김영란법을 폄하코자 하는 의도는 아니다. 오히려 ‘3만원의 잣대’로 만남의 정당성을 재단하는 상황을 자초한 현실이 안타까워서다. 권력을 감시하는 책무를 가진 언론이 공권력과 한통속으로 엮여 법의 제재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언론인이 김영란법에 포함된 것을 지지하는 여론이 반대 여론보다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에 치부를 드러낸 것처럼 화끈거릴 뿐이다.


법가가 꽃을 핀 배경엔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이 있었다. 김영란법의 이면에도 공권력에 대한 극심한 불신이 깔려 있다. 2011년 ‘벤츠 여검사 사건’을 계기로 국회에 제출됐지만 방치되던 김영란법은 ‘관피아’ 논란을 일으킨 ‘세월호 참사’가 제정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세월호 침몰 이후 수습 과정에서도 법이 정해놓은 절차와 과정이 무시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법치의 실종이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입법 논의 초기 과정에서 언론매체들은 우호적인 보도를 통해 김영란법을 의제화하고 지지 여론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입법 과정 막바지에 언론인 스스로가 법률 적용 대상에 포함된 것은 ‘반전’이었다. 김영란법이 부패의 만연이나 법치의 실종을 조장 또는 방조한 장본인 중 하나로 언론을 지목하자 매체들은 일제히 부정적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법 적용 대상으로 전락한 반감에 경제적 피해를 부풀리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민주주의 원리를 과도하게 강조하다보면 법치주의가 무시되고, 반대로 형식적 법치주의를 너무 강조하면 민주주의가 무시될 수 있다. 김영란법이 언론 자유를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2000여년 전의 한비자가 깨어나 김영란법을 본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너희들은 변한 게 하나도 없구나. 역시 내가 옳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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