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잔혹한 역사…치열하게 살아가는 게 우리의 할일"

[YTN 해직 8년…당시 입사 기자들 소회]
윗선 입맛 맞는 취재만 늘어
'자판기 저널리즘' 홍위병 심정
무기력한 YTN 바꿀 열쇠는
해직선배들 복직 밖에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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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머리가 수북해진 노종면 선배를 보고 시간 참 야속하다 싶었습니다. 20대에 입사한 제가 30대 후반이 되는 동안 선배도 묵묵히 세월을 받아내셨겠죠. 울면서 헤어졌지만 해피 엔딩을 꿈꾸며, 당당히 기다리겠습니다.”


지난 2008년 권민석 YTN 기자가 수습딱지를 막 뗐을 무렵의 일이다. 보도국은 대통령 특보 출신의 사장 선임으로 발칵 뒤집혔다. 기자들은 사장 출근 저지와 단식농성에 나섰고, 회사는 당시 노종면 노조위원장 등 6명을 해고하는 등 무더기로 징계했다.


지난 2014년 대법원은 권석재, 우장균, 정유신 기자에 대해 해고 무효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YTN 후배들은 웃지 못한다.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노종면, 조승호, 현덕수 기자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7일 서울 상암동 난지캠핑장에서 ‘YTN 해직 8년 행사’가 열렸다. 이날 참석한 노종면(왼쪽부터), 조승호, 현덕수 기자는 해직된 지 8년이 지났지만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이날 노 기자는 “우리가 공정방송을 위해 파업보다 더 어렵고 두려운 투쟁을 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YTN노조 제공)

지난 7일 서울 상암동 난지캠핑장에서는 ‘YTN 해직 8년’ 행사가 열렸다.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밤, 해직기자들과 100여명의 YTN 선후배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올해가 마지막 행사이기를 바란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했다.


행사장을 찾은 노종면 해직기자도 “우리가 공정방송을 위해 파업보다 더 어렵고 두려운 투쟁을 했다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지쳐있고 힘겹지만 함께 8년을 잘 버텨온 만큼 힘을 내자”고 후배들을 독려했다.


당시 막내에서 어엿한 9년차 선임이 된 12기 기자들은 촛불을 들고 선배들 앞에 섰다. 이들에게 지난 8년은 자책감과 부채의식으로 남아있다.


“선배들이 해직되는 불행이 내가 입사해서 벌어진 일은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울했던 때도 있었어요. 사내 전통인 탈수습 행사는 치루지 못했지만 해직 행사는 1주년부터 매번 봐야만 했죠.”(김현미 기자)


“기분 좋게 웃지도 못하고 마음이 무거웠는데 정작 해직된 선배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술잔을 기울이시더라고요. 그 소탈한 모습에서 또 마음이 아팠고 죄송했어요.”(양일혁 기자)


이들이 기억하는 과거의 YTN은 활기차다. 김도원 기자는 “선배들은 취재 의욕으로 가득했고 24시간 보도전문채널을 이끌고 있다는 자부심도 높았다”고 했다. 양일혁 기자 또한 “부서마다 활기가 넘쳤고 곳곳에서 목소리를 높이며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며 “그런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풍토이자 문화로 제 몸에 체화돼 갔다”고 설명했다.


▲2008년 YTN 해직 사태 당시 막내였던 12기 기자들이 해직 8주년 행사에서 다시 촛불을 들고 선배들 앞에 섰다. 왼쪽부터 권민석, 양일혁, 김도원, 김현미 기자.

하지만 해직 사태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권민석 기자는 “해직 사태 직후엔 울분과 분노가 보도국에 가득했고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통곡하는 선배들도 많았다”며 “누구도 서로를 위로해 줄 수 없는 파탄의 시간이 1~2년간 지속됐다”고 전했다. 양일혁 기자는 “활기가 넘치던 보도국은 도서관처럼 변했다”며 “선후배 사이의 대화는 점점 가로막혔고 한숨과 푸념만이 맴돌았다”고 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렀다. 기자들은 의욕 상실과 자기 검열을 가장 큰 문제로 꼽는다.
“기자로서 의욕을 가지고 취재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하는 분위기라고 할까요. 자발적인 발제 대신 윗선의 입맛에 맞는 취재만 늘어났죠. 지시에 작은 반발만 해도 싸움꾼으로 매도당하거나 실제 징계를 당하기도 했어요. 서로에 대한 믿음도 많이 사라졌고요.”(김현미 기자)


“정권 비판을 금기시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 돼버렸어요. 정권 비판 보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면 ‘균형을 맞춘다’는 명분으로 찬반 분량을 맞추거나 여야의 정치공세로 만들어 버렸죠.”(김도원 기자)


“트집 잡히지 않고 방송하는 데 에너지를 낭비하다보니 유의미한 기사를 발굴하고 싶은 열정이 사라지더라고요. 타사 보도를 받아쓰기하는 ‘복붙 보도’, ‘자판기 저널리즘’의 홍위병이 된 심정이에요.”(권민석 기자)


▲지난 7일 서울 상암동 난지캠핑장에서 열린 ‘해직 8년 행사’에 참석한 YTN 선후배 70여명은 “올해가 마지막 행사이기를 바란다”며 간절함을 표했다.

이들은 지금의 무기력한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열쇠는 선배들의 복직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김도원 기자는 “선배들의 복귀는 YTN이 공정한 보도를 하는 뉴스채널로 거듭나는 상징적 사건이 될 것”이라며 “저희도 지금의 자리에서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현미 기자는 “꼭 복직될 것이란 믿음을 져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사측과 후배들에게 이 문제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게 제가 할 일”이라고 전했다.


권민석 기자는 “줄지 않는 부채의식을 닻으로 삼고 항상 여기서 번듯한 회사 만들어 아랫목을 데워두겠다”며 “남 탓 하지 않고 더 치열하게 하루를 채워나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양일혁 기자도 “선배들의 복직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복직 이후’”라며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고 밑그림 작업에 나서겠다”고 했다.


이날 행사를 진행한 박진수 노조위원장은 “정치권에서 자행된 일인 만큼 정치권에서 원상복귀를 시켜야 한다”며 “해직 8년은 언론사 유례도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역사다. 부디 9주년 행사는 복직행사가 되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고 전했다.

이진우 기자 jw85@journalist.or.kr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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