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걱정 않고 떳떳하게 취재하고 싶다"

취재비 현실화 목소리 봇물
조선·중앙, 모든 비용 지원
국민·한겨레 실비정산 방침
대다수 언론 눈치 보며 관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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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간지의 산업부 A기자는 최근 부쩍 고민이 많다. 신차가 나올 때마다 누구보다 발 빠르게 취재를 해왔지만 김영란법 때문에 시승이 막혀 체험 기사를 쓸 수 없게 된 것. IT 등 다른 산업 분야를 맡고 있는 기자들의 사정도 다르지 않다. 한 경제방송사의 유통전문 B기자는 홍보팀에서 준 보도자료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됐다. B기자는 “김영란법의 취지에는 공감한다”면서도 “매사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다보니 자연히 취재자유가 위축된 것 같다. 임금이나 취재비 현실화 등의 적극적인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방송 기자들도 취재비 개편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 방송사의 C기자는 그동안 인터뷰를 하러 갈 때 함께 간 스텝들의 밥값을 책임져왔다. 취재원들을 만날 때는 따로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에 스텝들의 식사비를 챙기는 건 부담이 아니었다. 하지만 김영란법 이후 ‘무조건 더치’를 하게 되면서 모든 자리가 꺼려지기 시작했다. C기자는 “취재원과의 관계에서는 그만큼 덜 만나게 되니 얻는 정보도 줄고, 스텝들과도 서먹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국민권익위원회 주최로 지난달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언론기관 종사자 대상 김영란법 설명회에서 참석자들이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28일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 기자들 사이에서는 취재비나 법인카드 사용액 등을 현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그간 식사 값부터 취재시 들어가는 비용 등을 취재 대상이 지원해주는 관례가 법으로 금지되며 임금 체계 자체를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 일간지의 온라인 부서의 기자는 “아무리 이름 있는 언론사라고 할지라도 기자의 연봉 수준은 대기업에 한참 못 미치는 게 현실”이라며 “좋은 취지로 법을 만들었다면 당연히 그에 맞는 대책도 내놓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부 언론사들은 취재비 체계를 손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앙일보의 경우 기자 개인당 지급되는 법인카드의 한도를 사실상 없애고, 취재에 들어가는 일체의 비용을 회사가 부담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현재 취재비가 부서별·직급별로 차등 지급되고 있지만 평균적으로 현금 20만원에 법인카드 30만원까지 지원받아온 중앙일보 기자들은 앞으로 부서장의 승인 하에 추가로 취재비를 쓸 수 있다.


경쟁사인 조선일보도 취재비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지난달 3일 방상훈 조선 사장은 “회사는 앞으로 해외 출장을 포함해 취재원들과 만나서 식사할 때 들어가는 비용은 물론, 취재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회사에서 지원하겠다”며 “취재와 업무 등 모든 대외 활동에서 사원들은 당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영란법 이후 추가로 들어가는 취재비에 대해 실비 처리하는 방안을 내놓은 언론사도 있다. 국민일보는 추후 임단협에서 취재비 개편 사안이 다뤄지기 전까지 2개월 동안 실비로 정산하기로 했다. 국민은 “법 해석이 시행 초기라 유동적인 만큼 사측의 경비 부담과 관련해 정확한 지침이 내려지기 전까지 회사가 검토한 데에 따라 실비 정산토록 할 것”이라며 “내부 지침은 이미 내려졌고 기존의 윤리강령과 사규를 수정하는 방안 등도 노사가 논의를 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겨레 또한 취재원과 만나는 과정에서 초과 금액이 발생했을 경우 영수증을 내면 한 달치를 모아 실비로 처리할 수 있게 했다.


언론사들의 이러한 ‘취재 지원 선언’에도 불구하고 기자들은 보다 실효성 있는 해결책을 요구한다. 실비 처리와 같은 땜질식 처방은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이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주요 언론사에서 내놓은 ‘부서장 승인’ 조건이라든가 ‘실비 처리’ 등을 실제로 활용하는 기자가 몇 명이나 되겠나”며 “경영진의 보여주기식에 불과하다. 결국 눈치보고 제대로 쓰지 못하는 미봉책으로 그칠 것”이라고 꼬집었다.


다른 경제지의 기자도 “젊은 기자들 사이에서 취재비 인상을 주장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것을 잠시 잠재우려는 전략”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일간지의 기자는 “타사 눈치보느라 급급해 구체적인 방안이 나오지 않고 있다”고 꼬집었다.


방송 기자들의 사정은 더욱 좋지 않다. SBS와 KBS, YTN, CBS 등 방송사들은 경영난을 이유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는 상황이다. 취재비 인상은커녕 삭감이 목표다. SBS는 법인카드 보전액이 직급별·보직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수년째 30만원을 유지하고 있다. 김영란법이 실시됐지만 변화 계획은 없다. KBS 또한 16만원 한도의 취재활동 경비가 실비 형태로 지원돼왔는데, 사측은 경영상태를 이유로 삭감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 간부들의 법인카드 한도를 줄인 CBS도 취재비 인상에 대해 입을 막고 있다. CBS의 한 기자는 “선후배들 사이에서 당연히 취재비나 임금 인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지만, 사측이 경영상태를 내세워 취재비는커녕 야근비 인상도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기자들의 원활한 취재 활동을 위해서는 노사 간 대화를 통해 취재비 개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경영 사정이 좋지 않은 지역 언론사의 경우 적극적인 논의가 절실하다. 한 지역방송사의 기자는 “이미 경영난이 지속돼 취재비가 많이 깎여 취재를 할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가 됐다”며 “기자들이 이미 지칠대로 지쳤다”고 했다.


또 다른 지역방송사의 기자도 “광고를 따기 위해 기업들에게 나름대로 접대를 해왔을텐데 김영란법으로 그 비용이 보존된 만큼, 기자들이 마음 편히 일할 수 있게 (그 비용을) 돌려줄 필요가 있다”며 “노사가 머리를 맞대고 김영란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했다.

이진우 기자 jw85@journalist.or.kr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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