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에서 사라진 약속…공연비용 지불하고 취재

<김영란법 시행 기자사회 풍경>
첫 위반사례 될까 '조마조마'
저녁 있는 삶 가능해 반기지만
만나줄 취재원 있을까 걱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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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들 세계에도 ‘빈익빈 부익부’
한 일간지 A부장은 “원래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들만 기자 업을 계속 이어가지 않겠느냐”고 한숨을 내쉬었다. 주머니 사정이 두둑한 사람이 취재에도 더 유리한 시대가 올 것이라나. 웃픈 이야기다.


# 왕따 기자들
“반기지 않는 손님이 됐네요.” 단체 모임에 익숙한 한 방송사 6년차 B기자는 최근 뚝 끊긴 약속에 왕따가 된 기분이다. B기자는 “‘기자의 인맥은 신기루’라는 말을 새삼 느꼈다”고 한탄했다.


# “집사람과 싸움이 늘었어요”
술자리가 줄어드니 집사람과 대화가 잦다. 한 일간지 C기자는 “함께 있는 시간이 늘수록 말다툼도 늘었다”고 푸념했다. 10여년을 살면서도 몰랐던 버릇을 이번에 알게 됐다나.


# “이젠 데이트도 가능해요”
술 한 잔에 홍당무가 되는 젊은 기자들에게 김영란법은 구세주다. 한 방송사 D기자는 “저녁 있는 삶이 꿈만 같다”며 “정치부에 있으면서 연애도 미뤄왔는데 술자리가 없어져 당장 소개팅을 잡았다”고 기뻐했다.


기자들의 일상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점심 반주는 물론, 저녁 술자리까지 연이어 잡혀있던 스케줄이 10월 달력에서는 종적을 감췄다. 취재원과 차를 마실 때도, 심지어 형님 동생 하던 선후배 간에도 괜히 찝찝해 ‘더치페이’를 한다.


고급 식당과 술집, 골프장은 울상이다. 여기저기서 “단골손님이 반으로 뚝 떨어졌다”는 곡소리가 터져 나온다. 2, 3차까지 이어지던 저녁 회식은 간소화되고, 주말 인산인해를 이루던 필드는 푸른 잔디만 덩그러니 남았다.


홍보맨들은 환호와 탄식을 동시에 내뿜는다. 갑질이나 폭음에서 벗어난 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만큼 홍보계가 위축될 거라는 우려에서다. 모 대기업 홍보팀 팀장은 “당분간 기자들과 식사자리를 만들지 말라는 게 회사의 방침”이라며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업계가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걱정했다.


지난달 28일부터 시행된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사회 전반을 대대적으로 개편하고 있다. 2만9000원짜리 ‘김영란 정식’을 내놓은 고급 한정식집, 모든 좌석을 3만원 이내로 통일시킨 공연 업계와 파격 할인 행사를 벌이고 있는 골프 업계. 이 가운데 언론계는 ‘첫 타자는 되지 말자’며 몸을 잔뜩 움츠린 모양새다.


기자들은 기자실에 출근하자마자 김영란법의 위력을 체감한다. 매일 아침 기자들의 허기를 채워주던 김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구내식당 조식 보조금도 잠정 폐지됐다. 기자실을 이용하는 기자들에게 제공됐던 주차권 혜택도 더는 없다.


그간 당연시돼온 기자실의 지정 좌석도 대대적인 손질이 불가피하다. 기업이 운영하는 기자실의 경우 특정 언론사에만 고정석을 제공하는 게 위법이라는 권익위의 유권해석이 나오면서 출입기자단 등록 절차를 완화하거나 매체별로 지정됐던 기자석 운영 방식을 변경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몇몇 증권사는 기자실 운영을 잠정 중단하거나 폐쇄해 당장 갈 곳 잃은 기자들도 생겼다.


문화부의 한 기자는 “오페라, 뮤지컬, 발레 등 5만원이 넘는 공연엔 직접 비용을 지불하고 취재에 나서야 하고, 영화는 기존에 사용하던 모니터링 카드 대신 취재비로 관람해야 한다”며 “취재 방식에 변화가 일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김영란법에는 언론계 구태나 악습, 군대식 선후배 문화, 허례허식을 뿌리 뽑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취재에 걸림돌이라는 우려가 공존한다.


한 일간지 10년차 기자는 “만남을 극도로 조심하는 상황에서 출입처의 공식 자료나 구두로 전달하는 입장에 의존하면 기사 퀄리티는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중견 기자도 “정보라는 대가를 기대하고 취재원에게 밥을 살 때도 많다. 이때마다 더치페이를 해야 한다면 쉽게 만나줄 취재원이 있을지 걱정”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통신사 사회부 기자는 “사회부 특성상 취재원의 범위가 매우 광범위한데, 업무 연관성을 따지다 보면 아무도 못 만나는 것 아니냐는 생각에 위축되기도 한다”고 토로했다.


반면 김영란법이 이미 시행된 만큼 언론계를 긍정적으로 바꿀 신호탄으로 삼아야 한다는 인식도 있다. 한 일간지의 중견 기자는 “기업이 접대비로 쓰는 비용이 어마어마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해당 자금을 인력·연구 개발비나 임금 등에 투입한다면 장기적으로 국가 경쟁력에 좋은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일간지의 주니어 기자도 “출입처에 의존하는 관습을 버리고 발굴 기사를 확대할 기회”라며 “이제 술로 취재하는 시대가 아니라 공부해서 취재하는 기자가 살아남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진우 기자 jw85@journalist.or.kr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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