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대한민국의 공기가 달라진 것 같다.”


김영란법(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 법) 시행 직후 한국사회의 반응이다. 사회 곳곳에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풍속들이 나타나고 있다. 결혼식장과 장례식장을 가득 메우던 화환들이 사라졌다. 법인카드 손님들로 붐비던 고급식당들도 빈자리가 많이 보인다. 주말마다 손님들로 가득 찼던 골프장도 예약 취소가 잇따르고 있다. 대신 건강한 두 다리와 함께 하고픈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가능한 등산이 더욱 성황을 이룬다. 부정한 청탁과 금품수수라는 ‘황사’로 오염된 대한민국의 공기가 깨끗해져가는 징조들이다. 아직 시행한지 1주일밖에 안돼 단정짓기는 힘들지만 긍정적 신호인 것은 분명하다.


부정청탁에 기대어 기득권을 누려온 세력들이 법시행에 반대하고, 피해규모가 수십조원이라는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것은 여전히 경계 대상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좋은 변화와 혁신이라도 적지 않은 비용과 노력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정부는 초기에 예기치 않게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농어민을 배려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영란법의 핵심은 부패한 나라라는 오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동안 외신들은 한국을 “부패를 성장을 위한 필요악으로 인식하고 관대하게 대응하는 사회”(파이낸셜타임즈) “법조계·군인·교사·고위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촌지나 떡값 같은 부패가 만연한 나라”(르몽드)로 묘사해왔다. 한국은 국제투명성기구(TI)의 부패인식지수(CPI)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27위로 하위권이다. 이를 고치지 않고는 지속가능하면서도 떳떳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민권익위원회 주최로 지난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언론기관 종사자 대상 김영란법 설명회에서 참석자들이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뉴시스)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있는 프로야구를 예로 들어보자. 심판이 선수에게 부정청탁과 부정한 금품을 받고서 볼은 스트라이크로, 스트라이크는 볼로 판정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또 아웃은 세이프로, 세이프는 아웃으로 정반대 판정을 내린다면, 과연 정상적인 경기가 가능할까? 선수와 감독들은 열심히 연습해서 경기력을 높이기보다 부정청탁에 혈안이 될 것이다. 결국 관중들은 경기장을 찾지 않을 것이고, 프로야구는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경제와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노력과 실력으로 경쟁하지 않고, 학연·지연 등의 연줄을 통한 부정청탁으로 사업권을 따내고, 매출을 올린다면 어떻게 될까? 기업인들은 모두 기술개발, 판로개척, 인재양성과 같은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열심히 하기보다 연줄찾기와 부정청탁에 혈안이 될 것이다. 그런 경제가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하고 경쟁력이 있을까? 현대경제연구원은 한국의 청렴도가 경제협력개발기구 평균 수준만 돼도 경제성장률이 0.65%포인트(2010년 기준) 정도 추가 상승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김영란법은 3·5·10(예외적으로 허용되는 음식·선물·경조사비 지출한도)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 모두가 부정청탁을 하지도 받지도 말고, 부정한 금품은 숫자와 상관없이 주지도 받지도 않는 ‘변화의 대장정’을 위한 출발점이다. 앞에서는 숫자(예외적 허용한도)를 지키는 듯하면서도, 뒤로는 계속 부정청탁이 오간다면 한국사회의 근본 혁신은 불가능하다.
김영란법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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