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더 망가지지 마라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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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데까지 가보자는 것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이정현 녹취록’에 침묵한 KBS 보도방향을 비판한 기자를 제주로 내친 지 한 달이 넘었다. 보복인사를 철회하라는 동료들의 피케팅 시위는 폭염의 열기만큼 뜨겁다. 기자협회보가 창립 52주년을 맞아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76%의 기자들이 이정현 녹취록의 본질이 ‘청와대의 언론통제’라고 직시했다. KBS가 녹취록을 보도한 내용과 방식엔 51%가 적절하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는 분명했다. 회사는 귀를 닫고 버티고 있다. 입으로는 매일 ‘국민의 방송 KBS’ 멘트를 내보내고 있다.


‘국민의 방송’은 이제 ‘사드 외부세력’ 보도지시를 거부한 기자들을 특별감사하고 있다. 사드 배치 후보지인 성주 현장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이 ‘시위에 외부세력이 개입됐다’는 제작 지시를 거부했다는 게 이유다. 기자들은 ‘팩트 확인이 안 됐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회사는 기자들의 리포트 거부에 ‘리포트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압박했다. 그 상황이 무엇인지 눈치껏 헤아리지 못한 기자들이 감사를 받았다.


‘기자의 생명은 팩트’라고 배운 KBS지역총국 기자 100여명이 지난 20일 여의도 본사에서 비상총회를 열었다. “저널리즘의 기본을 말했을 뿐입니다. 저희는 해사 행위를 한 것이 아닙니다. 추락해가던 KBS의 자존심을 조금이나마 세워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곡해하지 말아주세요.” 대구에서 올라온 기자는 징계수순을 밟는 회사에 호소했다. 팩트를 취재하고 사실을 전달했다고 징계받는다면, 기자들은 설 곳이 없다. KBS가 말하는 ‘국민’에 함께 일하는 동료기자들은 없다.


어이없는 일은 그치지 않는다. KBS가 투자한 영화 ‘인천상륙작전’ 리포트 지시를 거부한 두 명의 기자가 인사위에 회부됐다. 데스크가 낮은 평점을 주는 평론가 비판 기사를 주문했지만 취재기자는 ‘편향된 리포트’라며 거부했다. 회사는 정당한 취재지시 거부에 따른 취업규칙 위반으로 징계할 태세다.


하지만 KBS 편성규약 제6조3항은 “취재 및 제작 실무자는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신념과 실체적 진실에 반하는 프로그램의 취재 및 제작을 강요받거나 은폐·삭제를 강요당할 경우 이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또 제5조4항은 “취재 및 제작 책임자는 실무자의 취재 및 제작 내용이 자신의 의견과 다르다는 이유로 수정하거나 실무자에게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다.


언론사는 다른 조직보다 기자 개개인이 갖는 대표성이 큰 조직이다. 그만큼 책임도 크다. 그걸 알기 때문에 기사를 쓰거나 리포트를 내보낼 때 신중할 수밖에 없다. 때론 언쟁을 하며 험한 분위기까지 가면서도 금세 풀어지는 것은 사적 이익이 아닌 공적인 보도를 한다는 공통분모가 있어 가능하다. 서로 신뢰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와 간부들이 걸핏하면 징계카드를 꺼내들고 ‘까라면 까’ 식으로 명령에 복종하기를 바라는 조직은 후진적이다. 그곳을 언론사라고 보기는 힘들다. KBS처럼 ‘국민의 방송’은 더 민주적이어야 한다.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1위 KBS가 올해는 그 자리를 내줬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권력을 비판하기보다 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보도, 국민의 아픔을 살피지 않고 청와대의 심기만을 살피는 보도 때문은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한솥밥을 먹고 있는 동료들의 쓴소리는 조직이 아직 건강하다는 신호다. 모두가 ‘예스’를 외칠 때 한 명이라도 ‘노’를 외칠 수 있어야 위기에 대비할 수 있다. 지금처럼 미디어 격변기에는 다른 목소리를 더 들어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국민의 방송’이라고 떳떳하게 말하려면 그쯤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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