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직 내려놓자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리랜서 기자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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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기자로 사는 것은 한 마디로 거칠고 힘들다. 고용과 생계, 미래가 불안정하다. 세상에서 ‘갑’으로 분류되는 기자와 달리 ‘을 중의 을’이며, 실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냉정한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신문이, 방송이 세상에 필요하듯이 프리랜서 기자도 이 세상에 필요하다. 그들만이 취재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독자들은 기꺼이 그들을 필요로 한다. 기자협회보는 지난 11일~12일 프리랜서 기자로 살고 있는 3명의 기자들을 만났다. 한국 언론계에서 프리랜서 기자의 존재감은 너무나도 미미하지만 그들의 자취, 그들의 그림자는 결코 얕지 않았다. 프리랜서와 한국 언론이 공조한다면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진실을 파헤치고 싶다면, 나오라” 박상규 기자


10년 근무 오마이뉴스에 사표
무기수 김신혜 사건 등 재심 이끌어

소셜펀딩으로 2억5천만원 모아


박상규 기자가 포털 사이트 다음의 스토리 펀딩에 프로젝트를 올리면 거의 대부분 목표치를 훨씬 웃도는 금액이 모인다. 이때까지 모인 총 금액만 2억5000여만원, 프로젝트 당 평균 2800만원 수준이다. 후원자들은 “마음 깊이 응원한다” “세상에 정의가 있다는 걸 보여달라”며 기꺼이 그의 프로젝트에 쌈짓돈을 꺼냈다. 일개 프리랜서 기자의 프로젝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 기자는 “좋은 콘텐츠는 통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상규 기자가 지난해 5월 용산참사 현장에서 이충연 용산참사 유가족과 인터뷰하고 있다.

‘기자는 소속 매체가 아닌 기사로 말한다’는 마음으로 그는 2014년 12월31일, 10년 근무한 오마이뉴스에 사표를 냈다. 오마이뉴스에서의 생활은 나쁘지 않았지만 매일 제 시간에 출근하고 제 때 제 때 보고하는 것이 기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정해진 포맷대로 글을 쓰는 것보다 좀 더 오래 들여다보고 공부해야만 쓸 수 있는 기사를 써보고 싶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뉴스를 틀어놓고 머리를 감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 뉴스에서는 여성 무기수 중 70%가 남편을 죽인 사람이라는 내용이 흘러 나왔다. 그는 머리를 감으면서 재미있는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주말과 휴가까지 반납하고 사비를 들여가며 취재를 했다. 그 때 그는 느꼈다. 그동안 썼던 기사들이 무용하진 않았지만 너무 쉽게 쓰였다고. 결국 그는 ‘계속 글을 쓰면 굶어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아쉬움이 완전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달마다 꼬박꼬박 나오던 월급이 끊기는 건 오히려 두렵지 않았다. 그보다 무서운 것은 한국 사회에서 ‘갑’으로 통하는 기자 직함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퇴사할 즈음 후배와 국수를 먹다 기자 직함을 내려놓는 게 무섭지 않느냐는 후배의 질문에 왈칵 눈물을 쏟아낼 정도였다. “속물적이지만 그 직함을 버려야 하는 것이 눈물 났죠. 하지만 그만두고 보니 두려움보다 행복이 컸어요. 하루 24시간을 자신의 의지대로 쓸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었죠. 보고 싶었던 책, 하고 싶었던 공부를 마음껏 했어요.”



당시 그가 진행하려고 했던 프로젝트는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직접 장의사가 돼 시체를 꿰매고 만지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죽음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일이 ‘꼬였다.’ 박준영 변호사에게 어느 날 연락이 온 것이다. 그는 만난 자리에서 재심 얘기를 꺼냈고, 그렇게 김신혜 친부살해사건의 취재가 시작됐다. 김신혜 친부살해사건은 2000년 김신혜씨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해 무기징역이 선고된 사건으로, 박 변호사는 김씨가 15년 동안 꾸준히 무죄를 주장하고 있고 수사 과정에서도 위법과 조작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믿기 힘든 말이었다. 의심은 컸고 막상 취재를 시작했으나 매번 흔들렸다. 하지만 진실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이 악물고 뛰어다닌 결과 그도 김신혜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원 역시 김신혜씨 사건에 재심 결정을 내렸다. 이후 ‘익산 택시기사 살인사건’과 ‘삼례 나라슈퍼 사건’ 등 극히 드문 살인사건의 ‘재심’을 세 번 연속 확정지으면서 그는 어느덧 재심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몸이 하나라 아쉽다고 했다. 풀리지 않는 사건, 써야 할 기사들이 세상에 넘치는데 혼자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문, 방송, 통신 모두 자기 역할을 하고 있지만 프리랜서만의 역할도 있습니다. 진실을 파헤치고 싶다면, 몸담고 있는 회사가 별로라면 나왔으면 좋겠어요. 세상은 프리랜서를 기다리고 있고, 그들이 쓸 기사는 무궁무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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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 목소리 전하는 매개체 되고 싶어” 정은진 기자


13년째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활동
전시 여성인권문제 집요하게 취재
프랑스 보도사진전 2년 연속 수상


“프리랜서는 헬게이트의 시작입니다. 지금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지 마세요.”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다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프리랜서는 그리 권장할 만한 직업이 아니고,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다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고용시장에서 거의 최하위권에 위치한, 비정규직보다 못한 불안정한 직업. 수입도, 근무시간도 불규칙해 미래가 불투명한 직업. 그래서 그는 되도록 프리랜서보다는 정직원이 되라고 조언하고 싶다고 했다.


▲정은진 기자가 2007년 아프가니스탄 북부 바닥샨 주에서 현지 경찰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그는 13년째 프리랜서 사진기자로 살고 있다. 2004년 2월 뉴욕의 사진 공급사인 코비스와 계약을 체결하며 전업 프리랜서로 뛰기 시작한 정은진 기자. 그는 13년째 뉴욕타임스와 일하며 블룸버그, 게티이미지, 독일의 슈턴, 슈피겔, 프랑스의 르몽드, 마담 피가로 등에 자신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정 기자가 처음부터 프리랜서였던 것은 아니었다. 미국 대학에서 사진과를 졸업한 그는 미주한국일보 뉴욕지사에 취직해 6년간 사진취재와 기사작성을 했다. 그러다 회사를 그만두고 뉴욕에 있는 AP의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보도사진에 발을 들이게 됐고, 그 후 미주리대 언론대학원에서 포토저널리즘을 전공하며 전업 프리랜서의 길을 걸었다.


정 기자는 “불필요한 인간관계나 피곤한 조직사회의 폐해를 매일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꿀 같은 휴식시간이 주어진다는 점, 그 시간을 활용해 나만의 작업을 기획할 수 있다는 점, 그 결과물이 오롯이 나의 것이 된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가 프리랜서로 뛰면서 주로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전시 중의 여성 인권이었다. ‘약자의 심부름꾼’이라는 일념으로, 그는 약자의 목소리를 전 세계에 전하는 매개체가 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인도네시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인도, 팔레스타인 자치구, 콩고민주공화국 등 수많은 국가를 돌아다니며 취재를 했다. 특히 아프리카 여성의 현실을 담은 사진으로 프랑스의 세계적인 보도사진전 ‘페르피냥 포토 페스티벌’에서 2007~2008 2년 연속 수상을 하기도 했다.



정 기자는 “이 세상에는 억울한 약자들이 너무나 많다”면서 “그 약자들을 내가 다 보살필 순 없지만 적어도 전시여성 인권문제, 아프리카 물 부족 문제, 결핵 등 후진국성 보건문제 등은 힘이 닿는 데까지, 죽을 때까지 취재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작업들이 쉬운 것은 아니다. 예산 문제는 물론 체력이 점점 떨어져서다. 그는 젊었을 때와는 다르게 나이가 들어 갈수록 정신적, 신체적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고 말했다. 공황장애와 우울증, 불면증, 역류성 식도염 등으로 큰 고생을 한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사진이 약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큰 기쁨일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사진을 그만두지 못했다고 말했다.


올해 3월부터 정 기자는 게티이미지와 새로 계약을 맺고 국내 사진 기사를 발굴해 해외에 알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정 기자는 굉장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평했다. “외국에서는 한국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데모, 북한 등 한정적이거든요. 그래서 좀 더 한국인의 소소한 일상을 발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보람을 많이 느낍니다. 한편으론 한국 언론에서도 프리랜서와 계약을 맺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요. 생계에 어려움을 겪는 프리랜서 기자들을 도와주는 동시에 독자들에게 색다른 콘텐츠를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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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미래를 상정하고 항상 꿈을 꿔라” 이호준 기자


정년퇴직 후 여행작가로 변신
여행에세이·칼럼연재 등 분주
새 매체 창간 준비 ‘무한 도전’


이호준 기자의 직업은 한때 6개였다. 기자, 시인, 여행 작가, 교수, 방송예술인, 전문사회자. 그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새로운 것을 공부했고 준비한 것들이 만나 시너지가 났다. 주말마다 여행을 다니며 여행 작가로 이름을 알렸고 EBS 세계테마기행에도 출연했다. 시인으로 등단해 산문집을 내기도 했다.


하지만 왕성한 활동을 한다고 정년퇴직을 피할 순 없었다. 이 기자는 2014년 9월 서울신문에서 퇴직했다. 당시 서울신문 정년은 만 55세로, 다소 이른 나이의 퇴직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쉬워하기보다 조금이라도 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1~2년 더 회사에 남아봐야 체력도 떨어지고 커뮤니티가 무너져 있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호준 기자가 지난해 1월 문화일보 연재를 위해 강원도 인제 원대리에서 자작나무 숲을 취재하던 중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실 퇴직 전부터 제2의 인생을 생각했거든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하고 싶었는데 그게 글이었어요. 글을 써서 먹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는데 순수 문학도 좋았지만 돈을 벌려면 여행 글이 좋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여행 작가로 어느 정도 자리매김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의 전략은 먹혀들었다. 퇴직하자마자 여러 곳에서 취재 요청이 왔다. 심지어 아무 연고도 없던 문화일보에서는 문화부장이 매주 여행 에세이를 연재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자사 기자가 있음에도 외부에 2개면 분량의 정식 연재를 요청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준비가 돼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1월부터 7월까지 그는 수요섹션에 ‘이호준의 나를 치유하는 여행’을 연재했다. 연재한 곳들은 가지 않아도 쓸 수 있는 곳들이었지만 그는 매주 해당 지역으로 취재를 갔다. 독자들은 과거가 아닌 현재 그곳의 모습을 보고 싶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덕분에 남는 건 별로 없었지만 보람은 컸다. 포털 사이트에서 매번 많이 읽은 기사 상위권에 그의 기사가 올라갔고 두터운 고정 독자층도 생겼다. 연재를 시작하고 3개월 후부터는 여러 군데의 출판사에서 그의 글을 책으로 만들자는 연락이 왔다.



하지만 매번 보람차고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프리랜서 신분이라 문전박대를 당한 적도 많았다. 퇴직한 다음 달 경상북도로 전통주 취재를 갔을 때는 양조장 직원이 “책 팔아먹으려는 것이냐”면서 인터뷰를 거절했다. “명함 한 장 없이 취재를 하는 게 진짜 고통이었습니다. 또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많으니 고독하기도 했죠. 하지만 그 과정을 겪다 보니 세상이 편해지더라고요. 기자로서 가진 오만을 벗어나는 연습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군가 불러주는 것에 감사하게 됐다. 정년퇴직이 일종의 사회적 퇴출임에도 행사에 초청받거나 자문위원으로 위촉될 때면 스스로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사양을 못하겠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그는 요즘도 쉴 새 없이 바쁘다. 고정칼럼만 4개를 쓰고 있고 새로운 매체 창간도 준비 중이다. 제3의 인생도 벌써 염두에 두고 있다. 한적한 곳에 가서 시만 쓰며 유유자적하는 삶이다.


이 기자는 말했다. “먼 미래를 상정하고 항상 꿈을 꿔야 합니다.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그 꿈을 좁히고 이뤄질 수 있도록 준비도 해야 하죠. 물론 회사 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습관처럼 하루하루를 살기보다 능동적으로 사세요. 시간이 없다는 것은 핑계입니다. 시간은 만들어 쓰는 겁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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