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의 부자증세론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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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올리는 공약으로는 선거에서 이기기 어렵다.”
정치인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 대선에서는 이에 상반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증세론을 펴는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감세론을 펴는 트럼프 공화당 후보에 앞서고 있는 것이다.


클린턴은 소득 최상위층에 대해 부유세를 부과하는 대신 중산층 세율은 현행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는 공약을 내놨다. 반면 트럼프는 최상위 부자들에게 적용되는 소득세 최고세율을 낮추고, 최고 35%에 달하는 법인세율도 15%로 내리는 부자감세 공약을 내놨다. 클린턴은 부자증세를 통해 경제적 약자를 돕겠다는 생각인데 반해 트럼프는 부자감세를 통해 소비와 투자를 활성화시켜 경제성장을 이끌어내겠다는 구상이다.


선거에는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클린턴의 우세 요인을 꼭 세금문제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클린턴이 증세론을 내걸고도 우세를 보이는 주요 요인으로는 미국사회의 불평등 심화 문제가 꼽힌다. 미국은 1970년대까지는 소득 불평등이 유럽이나 일본과 비슷했지만 신자유주의를 주창한 레이건 대통령이 집권한 1980년대 중반 이후 급속히 악화됐다. 미국은 최상위 1%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에 육박할 정도로 최악이다. 일본이나 유럽이 한자리 수에 그치는 것과 대조적이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는 최상위 0.1%의 근로소득이 전체 평균의 몇 배인지를 보여주는 소득배율에서도 미국은 최악이라고 말한다. 미국과 일본의 소득배율은 1970년까지는 10배 수준으로 비슷했는데, 최근 들어 일본은 13배로 약간 높아진 반면 미국은 45배로 치솟았다.


한국의 불평등은 미국보다는 덜하지만, 유럽이나 일본보다는 훨씬 심하다. 최상위 1%의 소득 비중은 10% 초반대에 달한다. 최상위 0.1%의 근로소득도 전체 평균의 22배로 일본의 두 배 수준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우리나라를 살기 힘든 곳으로 비하하는 신조어들이 확산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불평등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대통령이 무조건 ‘헬조선’이라는 말만 비판할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최근 개인부자들에 대한 소득세와 대기업에 대한 법인세를 올리는 세법개정안을 내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국민의당도 9월 정기국회 때 소득재분배 역할을 강화하는 내용의 세법개정안을 낼 방침이다. 하지만 정부여당은 경제계·보수언론과 함께 “대선을 겨냥한 세제 포퓰리즘”이라며 부자증세에 강하게 반대한다.


개인만 생각한다면 증세를 달가워할 국민은 드물다. 하지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생각은 달라질 수 있다. 한국의 복지수준을 선진국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정도로 끌어올리려면 재원 확보를 위한 세수 확대가 불가피하다. 더욱이 한국의 조세부담율(국민소득 대비 조세총액 비율)은 지난해 18.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에 비해 크게 낮다. 선진국과 비슷한 복지를 원하면서 세금은 훨씬 적게 내겠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당장은 부자증세가 쟁점이지만, 조만간 국민증세를 심각하게 고민할 시점이 다가올 것이다.


국민증세를 위해서라도 부자증세는 피할 수 없는 선결과제다. 부자들이 세금을 더 내는 것을 거부하는데, 일반 국민들이 주머니를 열기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클린턴의 부자증세안도 세계적 부호인 워렌 버핏이나, 뉴욕의 백만장자들이 부자증세를 자청한 것이 큰 힘이 됐다.
결국 선택은 국민에 달렸다. 2017년 말 대선은 그 결정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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