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 넣고 다니며 취재…묻혀버릴 사건을 파헤치다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제3부:그래도 기자는 기자다 ①성역에 도전하는 기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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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내리라”는 협박에 맞서 국제공조로 숨겨둔 자금 공개
제보자가 건네 준 계좌 2장이 어버이연합 차명계좌 밝혀내


언론이 눈 감아 버리는 ‘성역’이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입김이 세지고, 잦은 소송에 시달리면서 기자들 스스로 ‘자기검열’의 덫에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서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기자들의 외롭고 긴 싸움은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성역에 맞서는 기자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서다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선다는 것은 살얼음판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거액 금품수수 현직판사 사채왕과 유착 커넥션 추적’ 보도로 지난 2월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한국일보 강철원 기자 역시 이런 생각이 한 두 번 든 게 아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왜 기자가 됐나’ 그 생각을 했어요. 당연한 말이지만 진실 보도를 해보고 싶었죠. 내가 만약 보도를 하지 않으면 영원히 묻혀버릴 사건, 그것을 보도하는 것이 기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했어요.”


취재에 1년, 보도에만 10개월이 걸렸던 지난한 시간. 그 시간 대부분을 외롭게 싸웠던 강 기자는 양복 왼쪽 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닐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진실보도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7일 오전 한겨레신문 탐사기획팀원인 고나무, 김경욱, 김민경(왼쪽부터) 기자가 취재 관련 회의를 하고 있다.

2011년 말 사채왕 최씨에게 피해를 당했다는 조직폭력배 출신 사업가를 우연히 만나면서 그의 취재는 시작됐다. 처음에는 폭행, 위증, 변호사법 위반 등 죄질이 상당히 좋지 않은 사채왕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가 현직 판사와 유착관계를 갖고 있다는 증언이 여러 사람에게 나오면서 강 기자는 최민호 판사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채왕의 비리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전 내연녀를 3개월 동안 설득한 끝에 접촉했고, 그를 커피숍, 찜질방 등에서 100번 가까이 만나 같은 질문을 하고 또 하면서 확신을 가졌다.


그러나 쉽게 기사를 쓸 수는 없었다. 그는 내연녀의 주장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일과시간 이후나 주말에 시간을 내 돈을 줬다는 장소를 확인하고, 최씨 주변 인물들을 만나 사실 여부를 재차 확인했다. 최씨의 2년치 구치소 접견 녹음 파일을 별도로 입수해 지하철로 이동할 때나 걸어 다닐 때, 잠자기 전에도 듣고 다녔다.


“현직 판사가 금품을 수수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확인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시간이 걸리더라도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죠. 그런 저를 기특하게 여겼는지 아는 분이 FIU(금융정보분석원)를 통해 최 판사의 자금 흐름을 추적해주기도 했죠.”


기사를 준비하는 시간은 그나마 나았다. 보도 후에는 ‘1 대 100의 싸움이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대법원은 보도 내용을 전면 부인했고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압박을 넣었다. 한 변호사는 회사 쪽과 이야기가 잘 안 되니 강 기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기사를 내리지 않으면 각오하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 정도의 압박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미리 20일치 기사를 써놓은 것이다. 기사 한 꼭지가 나가면 최 판사와 사채왕이 반박할 것을 예상하고 그 반박이 다시 사실이 아니라는 기사를 준비해 놓았다. 그렇게 10개월 동안 그는 수차례의 단독 기사를 써냈다. 그리고 결국 지난해 1월 최 판사는 현직 최초로 거액의 금품수수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 사법기관의 성역에 맞서 싸운 강 기자의 쾌거였다.


전직 대통령의 업적을 샅샅이 해부해 문제점을 지적한 기자들도 있다. ‘MB 31조 자원외교 대해부’로 지난해 3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한겨레신문 탐사기획팀이다. 당시 탐사기획팀 소속이었던 임인택 한겨레 기자는 “이미 문제에 대한 기시감이 컸고 새 뉴스를 발굴할 수 있으리란 보장이 어려웠기에 반대가 심했지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면서 “자원외교로 이득을 보았을 기업과 권력자들의 책임을 추적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말했다.


취재팀은 자원외교에 관한 총체적 백서를 쓴다는 생각으로 2014년 10월 중순부터 지난해 1월까지 꼬박 석 달 동안 4명의 팀원이 취재에 매진했다. 아이템이 정해지자마자 관련 논문을 쓰거나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을 섭외해 강연을 듣듯이 팀원들이 학습했고 전문가들과 함께 취재계획과 가설을 구체화했다. 또 에너지 공기업들의 사업별 투자액, 손실, 성공불융자(정부가 기업의 해외자원 개발사업 참여를 지원하는 제도), 회수율 등의 자료를 국회의원과 협업 또는 정보공개를 통해 추적하고, 자원외교를 명분으로 이상득 전 의원이 6차례나 방문한 볼리비아, 페루 등을 동선에 따라 취재해 수많은 관계자들을 접촉했다.


그러나 취재 과정이 평탄할 리는 없었다. 취재가 진행될수록 공기업들은 정보공개나 취재를 지능적으로 회피했고 모르쇠로 일관했다. ‘책임이 없다’며 반박하는 산자부로부터는 전화 취재 중 욕설까지 들어야했다. 기사가 나가면서는 언론중재와 소송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탐사기획팀은 끈질기게 취재했다. 결국 처음으로 정치권에서 자원외교를 이용해 뒷돈을 받았을 가능성, 그간 한 번도 지적되지 않았던 국무총리, 산업부장관 등 정부 인사의 책임론, 특혜 의혹의 경남기업 등의 문제를 본격화해 짚을 수 있었다.

더욱 은밀해진 자본권력
광고 목줄을 쥔 자본권력은 정치권력을 넘어 저널리즘을 위협하는 노도다. 하지만 이런 도전을 헤치고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언론사도 적잖다.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인 뉴스타파도 그 중 한 곳이다.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는 무더위가 시작된 지난해 7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로부터 한 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국제 공조가 필요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참여할 의사가 있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김 대표는 고민할 것도 없이 참여의사를 밝히고 8월 독일 뮌헨에서 열린 관련 회의에 참석했다.


▲뉴스타파 김용진 대표(오른쪽)와 심인보 기자가 지난 4월4일 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빌딩에서 조세도피처 취재 결과 발표 중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씨가 조세도피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것을 찾아냈다고 발표하고 있다.(뉴시스)

지난 4월 전세계를 뒤흔든 ‘파나마페이퍼스(모색 폰세카 페이퍼스)’는 국제적 공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파나마페이퍼스는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이 한 제보자로부터 입수한 중남미 최대 로펌 모색 폰세카의 1977~2015년 거래 자료를 담고 있다. 이 문건에는 전세계 72명의 전·현직 정상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 외에도 각종 금융·주식 거래와 재산 변동 등의 내용을 담은 자료 1150만건이 수록돼 있다.


전세계 76개국·109개 언론사·376명의 기자가 참여한 이번 프로젝트에 국내에는 해직 기자가 주축이 된 뉴스타파가 유일하게 참여했다.


하지만 문건이 확보됐다고 해 모든 게 물 흐르듯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큰 난관은 문건에 나온 인물과 일일이 대조해 확인하는 일.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노재헌씨마저 직함을 걸어놓은 단체 등을 여러 차례 찾아 메시지를 남겨 놓았지만 모르쇠로 일관했다.


이처럼 문건에 나온 10명 중 1~2명꼴로 자기 입장을 밝힐 뿐 대부분은 침묵을 지켰다. ‘한국’이란 단어로 검색된 1만5000건의 문서 중 한국 이름과 주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195명이고 이 중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70여명뿐이었다. 여기에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사람만 300여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노씨 외에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고 서성환 회장의 장남 서영배 태평양개발 회장, 장진호 전 진로 회장, 보루네오가구 위상식 전 회장 부자, 모나리자·쌍용C&B 김광호 전 회장도 조세도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사실이 확인됐다.


뉴스타파 심인보 기자는 “조세 도피처 문제는 단순히 일부 부자들의 일탈로 보기엔 규모도 클 뿐 아니라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양립하는데 가장 큰 위협요소”라며 “민주주의 체제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근본적인 결함을 고치고 촉구하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숨은 권력’ 이익단체의 배후
이익단체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 밖에 밀려나 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이들의 힘을 기대고자 하는 시도는 여전하다.


JTBC 강신후 기자는 지난 4월 한 제보자로부터 어버이연합 차명계좌로 수억원을 보낸 입금주로 경제 4단체 중 하나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찍혀 있는 계좌 2장을 입수했다.


11차례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강 기자가 어버이연합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시점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JTBC 강신후 기자(정중앙)가 지난 4월22일 열린 어버이연합의 기자회견을 취재하고 있다. (JTBC 제공)

2013년 국회를 출입할 당시 더불어민주당 서영교 의원으로부터 “어버이연합이 폐지를 수집해 모은 돈으로 집회를 한다고 하는데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국정원이 보훈처를 도와줬듯이 분명히 그 배후가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관심의 끈을 놓지 않고 취재를 해오던 터였다.


강신후 기자는 “차명계좌로 사용된 벧엘선교재단은 경기도 양주에 위치해 있는데 계좌에 있던 돈이 현금인출기를 통해 20여차례 빠져 나간 곳은 어버이연합이 입주해 있는 근처였다”고 말했다.


‘전경련, 어버이연합 게이트’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4월19일 첫 보도가 나가고 어버이연합 추선희 사무총장은 전경련으로부터 받은 1억2000만원은 급식 명목으로 썼고, 본의 아니게 전경련에 폐를 끼쳤다고 시인했다.


당사자가 시인하면서 덮어질 수도 있는 일었지만 계좌 뒷장 말고도 앞장엔 어떤 내용이 있을까란 의문이 추가 취재로 이어졌다. 그 예상은 적중했고 추 사무총장은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됐다. 당초 해명과 달리 2012년부터 3년간 총 5억2300만원의 전경련 자금이 벧엘선교재단 계좌를 통해 어버이연합에 들어갔고, 여기에 CJ와 SK가 각각 1000만원, 5000만원을 입금했다. 이번 사건 역시 이념대결로 치부되기 쉬운 얘기지만 그 내막을 들어가 보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여론 조작을 기도하는 일이라는 게 강 기자의 설명이다.

끝까지 파헤치는 기자정신 중요
성역에 맞서는 기자들은 풀어야 할 과제 역시 여전히 산적해 있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특히 살아 있는 권력 간 유착관계가 더욱 은밀하고 정교해지면서 언론의 견제 기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


강철원 기자는 “어떤 일이 터진 후에야 언론이 지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나부터 반성하고 예방적 성격의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면서 “현직 판사 금품 수수 이후 대법원이 판사 임용 시스템과 검증방법을 강화하겠다고 했는데 잘하고 있는지 계속 지켜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신후 기자도 “언론보도를 통해 진실이 밝혀졌는데도 검찰이 움직이지 않다보니 후속보도가 쉽지 않다”며 “수사권은 없지만 전방위 취재를 통해 밝힐 수 있는 부분은 끝까지 캐내겠다”고 말했다. 이들이 여전히 기자로 살아가는 이유다.

김창남 기자 kimcn@journalist.or.kr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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