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은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영화 '인생(원제 活着)'은 작가 위화(余華)의 원작 소설을 스크린에 옮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국인은 이 영화를 본 적이 없다. 아니,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 중국 본토에서의 상영을 포기하고 외국에서만 개봉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60년대의 문화대혁명을 정면으로 다룬 까닭에 중국에서 상영될 수 없었다.
영화와 달리 TV 드라마는 그런 방법도 통하지 않는다. 감독·제작자는 눈물을 머금고 막대한 제작비가 든 작품을 버리는 수밖에 없다. 2000년 중국중앙TV(CCTV)가 촬영한 '항미전쟁'이 그랬다. 30부작으로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외교부의 반대로 방영이 무산되고 말았다. 중국군이 미국군을 물리치는 내용의 드라마를 내보내면 미·중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그 이후 줄곧 한국전 관련 드라마나 영화 제작은 금기시돼 왔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1960년대까지는 한국 전쟁 영화가 여러 차례 만들어져 인기를 얻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지시로 만들어진 1956년작 '상감령(上甘嶺)'은 중국 영화사의 한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주제곡 '나의 조국'은 지금도 제2의 국가 대접을 받는다. 그 뒤에도 '영웅아녀(英雄兒女·1964)', '기습(奇襲·1960)', '삼팔선상(三八線上·1960)' 등이 상영됐다. 한국 전쟁 영화·드라마는 개혁개방시기에 접어들면서 자취를 감췄다. 경제발전에 주력하면서 안정적인 대미관계를 중시한 중국으로선 미국을 적대시하는 내용의 '항미' 드라마를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은 1950년 10월 중국 인민지원군이 참전한 이후의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라 부른다.
그러고보니 시 주석은 부주석 시절이던 2010년 "항미원조전쟁은 침략에 맞선 정의로운 전쟁"이라 말한 적이 있다. 국경 너머 중국 영토까지 공격해 온 미국에 맞서 조국을 방위하기 위해 정당하게 참전했다는 인식을 드러낸 발언이다. 드라마 '삼팔선'의 줄거리도 압록강 너머까지 감행된 미군의 폭격으로 아버지를 잃은 주인공이 복수를 위해 지원군에 입대해 미군 및 한국군과 싸운다는 내용이다. 사실과 부합하는지 여부와 별개로 이는 중국 공산당의 공식적인 역사해석인 것은 물론, 시 주석을 포함한 많은 중국인들이 갖고 있는 인식이다. 다만 지금까지는 대외적으로는 애써 드러내고 강조하지 않았을 뿐이다.
'삼팔선'의 방영은 이런 자세에 변화를 예고한다. 지금까지 중국 안방극장의 단골 메뉴이던 항일 드라마의 숫자가 줄어들고 항미원조 드라마가 늘어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한국군은 여기서 적으로 그려지고, 그 한국군을 무찌르는 중국 병사는 영웅으로 추앙 받는다. 그럴 경우 중국인들의 대미 감정은 물론 한국에 대한 감정에까지 미묘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함께 피흘린 북·중 관계의 특수성이 강조되면 한반도와 주변국가의 역학 관계 방정식은 한 단계 더 복잡해진다. 리수용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이 중국을 찾아 시 주석을 만나고 북·중 관계의 복원을 모색하던 날에도 '삼팔선'은 방영되고 있었다. 이래저래 '삼팔선'을 보는 느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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