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종이학, 언론인 114명

[글로벌 리포트 | 일본]이홍천 도쿄 도시대학 교수

▲이홍천 도쿄 도시대학 교수

지난달 27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1945년 8월6일 오전 8시9분 고농축 우라늄형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중심부에 투하된 지 71년만의 일이다. 사용된 원자폭탄의 이름은 ‘리틀 보이’. 무게 4t, 길이 3m의 리틀 보이에 탑재된 50kg의 우라늄235 중 1kg이 핵분열 반응을 일으켰다.


노트북 컴퓨터 한 대의 무게에 불과한 우라늄은 TNT 1만6000t에 상당하는 폭발력이다. 상공 600m에서 터진 원자폭탄은 섬광과 함께 30만도의 고온, 열선과 함께 감마선을 포함한 대량의 방사선을 일순에 뿜어냈다. 폭발 후 1.7초 후에 등장한 거대한 버섯형 구름은 “아침에 일어나 보는 아이들의 웃음” “주방 식탁 너머로 느껴지는 아내의 부드러운 손길” “부모님과의 따뜻한 포옹”을 빼앗아 갔다.


지난달 27일 히로시마를 방문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4마리의 종이학을 접었다. 2마리는 원폭 피해자 가족인 2명의 학생들에게 선물했고, 나머지 2마리는 원폭 자료관 방명록 옆에 놓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직접 접은 종이학. 자신의 입으로 사죄라는 표현을 할 수 없는 대통령. 원폭 피해를 입은 일본 국민은 물론, 재일 조선인, 미군 전쟁 포로 등 원폭으로 인해 희생된 모든 사람들에게 바치는 대통령의 심정일 것이다.


28일 일본 언론이 방명록 옆에 놓인 종이학 사진을 공개하자 이를 보려는 행렬이 이어졌다. 원폭 돔을 바라보는 오바마 대통령의 뒷모습. 대통령의 표정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4마리의 종이학으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종이학 한 마리의 무게는 0.2g. 리틀 보이의 250만분의 1이다. 원폭은 에놀라 게이(Enola Gay)라고 명명된 미군 육군 항공대 소속 B29 폭격기에 실렸다. 4마리의 종이학은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서 만들어졌다. 언제 대통령이 종이학을 접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수만명의 무고한 시민의 목숨을 빼앗아 간 리틀 보이가 제작된 시간 보다는 길지 않았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을 누구보다 기다린 유가족들이 있다. 히로시마에 본거지를 둔 주고쿠신문사(中国新聞社). 많은 기자들이 본인들의 원폭 피해에도 불구하고 원폭 피해의 참상을 기록하기 위한 취재활동에 나섰다. 사진부의 마츠시게(松重美人)씨는 원폭 투하 후의 피해를 카메라에 담았다. 음료수를 구하려고 다리 난간 위에 모인 피해자들. 피부는 촛농처럼 녹아 내려 타버린 옷들과 뒤섞여 있었다. 셔터를 누를 수 없을 정도의 참상에 파인더가 흐려져 20분간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버섯구름을 지상에서 촬영한 편집부의 야마다(山田精三)씨. 촬영 당시 17세였다.


이들 사진은 다음날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 기사를 작성할 데스크도, 판을 짤 활자들도, 지면을 인쇄할 종이도, 이를 인쇄할 윤전기도 리틀 보이에 의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폭발 후 본사로 달려온 기자들의 눈앞에는 원폭 돔과 같은 피해를 입은 본사 건물의 폐해만이 남아 있었다. 원폭으로 인해 기자를 포함한 114명이 피해를 입었다. 전 사원의 3분의 2에 해당되는 피해다.


주고쿠신문의 지면이 다시 독자 손에 배달된 것은 이틀 후. 나고야에 위치한 마이니치신문 서부본사 시설을 빌려서 2면짜리 신문을 발행했다. 지면의 톱 뉴스는 미군에 의한 북 큐슈지역 공습기사였다. 엄혹한 정보 통제로 원폭 투하 사실이 실리지 못했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왕자 이우가 히로시마에서 작전 중 사망했다는 뉴스와 신형폭탄에 대한 대응을 알리는 것으로 원폭 피해를 간접적으로 알렸다.


8월12일자 신문은 아사히신문 서부 본사 시설을 빌려서 인쇄, 히로시마 각 지역의 벽면에 신문을 붙였다. 신문이 히로시마에 도착하기 전에는 구두로 뉴스를 전달했다. 피해자의 임시 구제조치, 피난소 위치 등을 구두로 전달하는 구전대를 결성했다. 8월12일에야 히로시마 원폭 투하 사실이 게재됐다. 신문사가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폭 투하 후 한달도 지나지 않은 9월3일 자사인쇄 체제를 회복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15분간 원폭 기념관을 둘러보고 17분간 연설했다. 다음날 지면을 두고 편집국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결론은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은 평가하지만 핵군축의 구체적인 진전은 보여주지 못했다”로 결정. 그럼에도 기자들은 마음속으로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을 환영했을 것이다.



이홍천 도쿄 도시대학 교수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