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무서웠다"

통신자료 털린 기자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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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지까지…통신자료 훑어
통신자료 왜 봤는지도 몰라
“기사한건 안 썼는데 조회”
취재원이 기자 믿을 수 있겠나


수사기관 언제든 표적수사 가능
사생활 및 언론자유 침해 우려
통신자료 무단제공 법 개정 필요
시민사회단체 헌법 소원 검토


▲전국언론노조가 지난달 30일 언론인 '통신자료 제공내역' 1차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언론사 17곳에서 기자 97명의 통신내역이 국정원, 검찰, 경찰 등에 제공된 것으로 나타났다.

# “경악스러웠습니다.” 통신사 A기자는 지난달 8일 KT가 보내온 통신자료 제공현황 결과를 보고 눈을 의심했다. 국가정보원과 경찰청, 서울지방경찰청이 지난해 6월부터 올해 2월까지 7차례에 걸쳐 자신의 통신자료를 조회했기 때문이다. A기자는 “통신조회 신청 후 결과를 받는 데까지 10여일이 걸렸다.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지 궁금해 담당자에게 물어봤더니 정보기관에 내가 확인한 사실을 보고하고 다시 결재 받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대답하더라”며 “이제 중요한 취재나 정보보고는 휴대폰으로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보·수사기관이 노동단체 실무진과 대학생, 일반 시민들은 물론 기자들의 통신자료까지 조회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지난달 30일 전국언론노동조합이 발표한 1차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1년간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은 194회에 걸쳐 언론인 97명의 통신자료를 조회했다. 언론노조는 “조회 당시 육아휴직자, 논설위원이었던 기자들도 통신자료 수집 대상이었다”며 “전국 일선 경찰서, 지방경찰청, 국정원, 국방부검찰단, 군수사단 가릴 것 없이 여러 곳의 수사기관에서 현업 언론인들의 통신자료를 무차별로 조회했다. 특히 기자들의 취재와 연관된 수사기관이 통신자료를 요청한 정황도 있어 문제가 심각하다”고 밝혔다.

 
언론사 내부에서는 이를 계기로 통신자료 사실확인서를 집단적으로 신청해보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현재 경향신문, 서울신문, 서울경제 등이 조사를 시작했으며 한국기자협회, PD연합회 등 직능단체들도 현업 언론인 전수조사를 하고 있어 건수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김광수 서울경제 지회장은 “기자협회 공문을 보고 사실확인서를 신청하라고 기자들에게 전달했다”며 “주로 사회부나 정치부 기자들이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어 경제지인 우리 회사에서는 별로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조회해보니 산업부, 금융부, 유통부 기자들까지 통신자료 제공 내역이 조회되고 있다”고 전했다.


통신자료 제공현황 결과를 확인한 기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통신자료가 왜 넘어갔는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지난해 6월 서울남부지검에 정보가 제공된 한국일보의 B기자는 “당시 경영기획실에 있었는데 연락하는 사람은 타사의 온라인·IT 담당자들 정도였다”며 “기사 한 건 쓴 적이 없는데 조회 당했다고 나오니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서울중앙지검에 통신자료가 넘어간 경제지 C기자도 “집회에 참가한 적도 없고 특별하게 쓴 기사도 없어 왜 조회를 당했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며 “당시 썼던 기사를 찾아봤지만 딱히 짐작 가는 게 없다”고 말했다. A기자는 “개인적으로 알아보니 통신자료가 제공된 기자들은 민주노총 집회를 취재했거나 지난해 11월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로 피신했을 때 박성식 민주노총 대변인과 통화한 사람들이었다”며 “또 반정부적인 보도를 하거나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 문제를 취재했던 기자, 과거 학생운동 전력이 있거나 그런 지인이 있는 기자들의 통신자료가 조회된 것 같다”고 분석했다.


▲통신사 A기자의 통신자료 내역서. 국정원, 경찰청 등은 지난 1년간 7차례에 걸쳐 A기자의 통신자료를 조회한 것으로 드러났다.

통신자료 제공이 ‘내 일’임을 실감한 기자들은 언론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서울지방검찰청에 통신자료가 제공된 종합일간지 D기자는 “취재원이나 내부정보원이나 누가 기자를 믿을 수 있겠느냐”면서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취재원이 밝혀질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중요한 얘기는 전화나 카톡이 아니라 직접 만나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지난해 9월 서울중앙지검에 통신자료가 넘어간 경제지 E기자도 “취재원이 드러날 수 있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취재활동 자체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사실확인서를 신청한 기자들이 많은데 서로 걱정하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종합일간지 F기자도 “사람마다 다를 것 같긴 하지만 이번 사태 이후로 자기검열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기자이기에 앞서 개인으로서의 공포감을 호소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지난해 3월 서울중앙지검에 통신자료가 제공된 지역 방송사 G기자는 “언론의 자유는 둘째 치고 개인적으로 무서웠다. 누가 나를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겁이 났다”며 “휴대폰이 내 이름으로 돼 있으니 아내 이름으로 바꿔야 하나, 대포폰을 써야 하나 등 별의별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이 지난해 4월부터 12월까지 3차례에 걸쳐 통신자료를 조회한 종합일간지 H기자도 “수사기관이 사실상 마음만 먹으면 표적수사를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든다”며 “주민등록번호와 주소지가 제공된다는 사실이 가장 신경 쓰인다. 거주지를 포함한 위치 정보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감시당하는 느낌이 들 것 같다”고 말했다.


정보·수사기관의 통신자료 조회는 수사상 불가피한 측면이 있지만 정보를 조회당한 당사자들이 수사기관의 자료 요청 이유를 알 길이 없어 공권력의 남용을 판단할 수 없다는 데 맹점이 있다. 전기통신사업법 83조 3항에 따라 이동통신회사는 정보·수사기관에 통신자료를 제공하고도 사후 통지를 하지 않아도 되고, 정보공개법에 따라 정보·수사기관은 자세한 설명을 거부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지미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변호사는 “기자의 경우 취재원 보호를 위해서라도 사전 통제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케이스”라며 “통신자료도 통신사실확인자료(통신내역·시간·위치 정보)처럼 법원의 허가(영장)를 받는 쪽으로 법 개정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시민사회단체 등에선 과도한 통신자료 조회가 국민의 통신비밀 및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법적 대응을 예고하고 있다. 참여연대는 국가기관을 상대로 정보공개청구소송과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나설 계획이고, 민변과 진보네트워크 등은 이번 달 중순 전기통신사업법 83조에 대한 헌법소원을 계획하고 있다. 언론노조도 이동통신사와 수사기관을 대상으로 한 언론인 집단 손해배상소송을 검토 중이며, 방송통신위원회와 미래창조과학부의 적극적인 역할과 규제 강화를 촉구하고, 20대 국회에서 관련 법제도 개선 운동을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여경 진보네트워크 정책활동가는 “현재 일반시민 500여명이 조회를 당했다고 알려오는 등 피해를 본 분들이 많다”며 “대규모 헌법소원 진행을 생각 중이고 특수한 사례의 경우 민사소송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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