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 "필리버스터, 민주주의 가치 끌어올렸다"

취재하느라 쪽잠 자며 현장 지켜
기자들 "분석기사 부족하다" 자성
'정치이념 뛰어넘기' SNS 뜨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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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오후 국회는 비교적 한산했다. 테러방지법 ‘독소조항’ 수정을 요구하는 야당의 필리버스터(무제한토론) 나흘째. 포털과 SNS 등에서 떠들썩한 것과는 달리 현장은 차분했다. 정론관에는 20여명의 기자들이 TV를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본회의장 모습을 지켜보고 있고, 각 부스에 앉아있는 기자들은 24시간 이어진 취재에 다소 지친 모습이었다. 인력이 부족한 주간지나 지방지 기자들은 소회의실에서 연이어 쪽잠을 자며 자리를 지킨 모양새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언론사마다 당직을 두고 필리버스터를 전담하고 있는데 여야의 진전 없는 협상이 이어지자 기자들도 다소 힘이 빠진 분위기”라고 밝혔다.


▲테러방지법 통과 저지를 위한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가 닷새째 진행중인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시민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있다. (뉴시스)


3층 본회의장도 조용한 모습이었다. 12번째 주자로 나선 김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필리버스터를 지켜보는 의원은 2~3명뿐이었다. 4층 방청석에는 60여명의 시민들로 북적였다. 주로 20~30대 젊은 층이 대부분이었다.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김 의원의 발언에 중간 중간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양 옆에는 10여명의 촬영기자들이 진을 치고 대기하고 있었다. 소회의실이나 부스, 브리핑실에서 TV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는 취재기자와 달리 촬영기자는 본회의장에서 뻗치기를 해야 한다. 한 촬영기자는 “필리버스터만 매달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서 취재기자들은 각 지역구 취재를 위해 지방에 내려가 있거나 당사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이번 필리버스터와 관련한 기사가 단순 보도에 그쳤다는 지적이 나온다. 누가 몇 시간을 했고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등의 표면적인 보도만 쏟아낸다는 것. 한 일간지의 기자는 “지금까지 나온 기사를 보면 대부분이 국회의원 개인에 대한 가십성 보도가 많았다”며 “테러방지법의 한계점과 왜 여야가 이렇게 대립을 하게 되는 건지, 앞으로의 방향은 어떻게 갈지 등에 대한 분석기사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구정은 경향신문 국제부장은 지난달 29일 칼럼을 통해 “올드미디어들이 일련의 사건을 나몰라라하는 것을 보니 화가 나기보다는 가련하다. 신문들이 쓰지 않는다 해서, 기사 비중을 줄인다 해서 몇날 며칠 계속되는 필리버스터를 시민들이 모를까”라고 비판했다.


각 언론사의 논조가 기사에 노골적으로 담겼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수뇌부의 취향에 따라 기사가 정해지는 게 이번 필리버스터 취재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났다”며 “현장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담아도 윗선에서 회사 기조에 맞게 데스킹을 한다.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 했다. 또 다른 경제지의 기자도 “그나마 우리 회사는 자유로운 편인 걸로 알고 있다. 다른 매체의 한 기자는 윗선의 지시로 필리버스터를 비판하는 내용의 기사를 쓰다가 시민들에게 ‘기레기’라는 악성 댓글에 시달려 힘들어한 동기도 봤다”고 했다.


▲지난달 26일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테러방지법을 두고 엇갈린 모습을 보인 여야. (이진우 기자)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기자들의 시각은 다양하다. 한 방송사의 9년차 기자는 “현 정부에서 국정원과 관련한 논란이 꾸준히 있었는데도 테러방지법을 밀고 나가는 이유를 모르겠다”며 “직권상정은 말이 안 된다. 유신으로 돌아가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또 다른 일간지의 기자도 “테러방지법을 밀어붙이는 여당이나, 죽자고 반대하는 야당이나 극단적인 모습은 보기 좋지 않다”면서도 “그간 감청 등으로 논란이 돼온 국정원에 역할을 부여한다는 건 논란거리가 될 만하다. 국정원이 아니라 경찰 등 다른 수사기관이었다면 이 정도로 반발을 사진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자들은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의견을 전하기도 했다. 한 일간지의 5년차 기자는 “필리버스터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면 네티즌에 욕설을 들을까봐 말을 못하겠다”며 “한쪽만 선이고 나머지는 악인양 극단적으로 여론몰이하는 것도 좋은 현상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또 다른 경제방송사의 4년차 기자는 “감시에 대한 우려는 있지만 야당이 총선 연기를 불사하고 떼를 쓰는 것 같아 답답한 감이 있다”고 전했다. 반면 중앙일보 이경희 키즈팀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은수미 의원에게 샌더스의 기운이 느껴진달까. 시대가 갈망하던 것이 적시에 나온 느낌”이라고 평했다.


▲지난달 26일 오후 국회 정론관 기자실에는 20여명의 기자들이 모니터를 통해 생중계되고 있는 필리버스터 현장을 취재하고 있다. (이진우 기자)


여야 진영논리를 떠나 필리버스터는 참신했다는 평이 주를 이룬다. 기자들은 이번 필리버스터가 ‘토론과 협상’이라는 정치의 양대 가치를 끌어올렸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소셜미디어를 통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는 ‘직접 민주주의’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줬다. 시민들은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의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SNS에 올렸고, 의원들은 시민들의 의견을 받아 실시간으로 중계했다. 직접 소통의 문이 열린 셈이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뿐만 아니라 아예 의원들에게 의견을 전할 수 있는 ‘필리버스터닷미(filibuster.me)’라는 사이트가 등장하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달 23일 10시간 이상 단상에서 발언을 해 주목을 받은 은수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연설 후 “온라인에 올라온 국민의 의견을 상당 부분 반영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시민들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1인 미디어를 표방하며 보도물을 재가공하기도 했다. 의원들의 인상적인 발언이나 장면을 모아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온라인에 공유한 것. SNS에서는 이를 두고 TV예능프로그램을 빗대 ‘마이국회텔레비전(마국텔)’로 부르기도 했다. 한 일간지의 기자는 “시민들이 SNS에 올려놓은 자유로운 취재물을 볼 때면 새삼 언론사가 배워야 한단 느낌이 들 때가 있다”며 “정치 이념을 뛰어넘는 보도가 자유롭게 나오도록 경직되고 비효율적인 분위기를 고쳐나갈 필요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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