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21조1항이 헌법37조에 발목잡힌 나라

[언론 다시보기] 문소영 서울신문 사회2부장

▲문소영 서울신문 사회2부장

TK인 새누리당 이완영 의원이 16일 “미국에서는 경찰들이 총을 쏴서 시민들이 죽는데 80~90%는 정당하다고 나온다. 이런 것이 선진국 공권력이 아닌가”라고 말했다는 뉴스를 보고 아연실색했다. ‘1인 헌법기관’의 발언치고는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현행 헌법 제21조1항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라는 조항을 전면 부인한 발언이 아닌가 싶다. 한국 헌법이 미국의 수정헌법 1조처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는 식의 표현의 자유를 절대시하는 헌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저런 발언까지 헌법이 허용할까 싶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헌법 제21조1항의 언론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환상일 뿐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헌법 제21조1항을 무력화하는 조항이 헌법 내부에 ‘단서조항’이 붙은 채 있는 탓이다. 헌법 제37조2항이다.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이다. 그러나 ‘국가안전보장과 질서유지 등의 공공복리’는 권위적 정부에서 그리스 신화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사람을 늘이거나 팔다리를 자르는 용도로 악용돼 왔다.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는 ‘단서조항’을 간과하고 기본권을 무력화한 것이다.


이 헌법 탓인지 한국 언론사도 이른바 ‘공공복리’를 우선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난다. 노동조합의 파업이 예고되면 언론은 면박을 주기 일쑤다. 이를 테면 ‘지하철 노조 파업’이 선언되면 문제의 파업이 시작하기도 전에 ‘시민의 발이 묶여 불편하다’는 기사들을 쏟아낸다. 그런 공론 환경에서 뚝심으로 파업을 밀어붙일 노조는 많지 않다. 또 노동계 등에서 대규모 시위나 집회가 예고되면 언론은 정부의 나팔수가 된 듯 ‘불법·폭력시위’를 예단한다. 1987년 이한열 연세대 학생이 경찰의 직격탄에 사망한 비극은 완전히 망각하고, 시위 현장에서 두드러진 경찰의 과도한 폭력적 진압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엄호된다.


헌법 제21조1항에 서로 성격이 판이해 보이는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가 함께 묶인 이유는 집회·결사의 자유가 ‘집단적인 표현의 자유’를 표출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공통의 집단적 의견을 형성하고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인류의 자연스런 행동양식이자 민주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불가결의 조건이다.


모순된 조항이 공존하는 한국 헌법의 원죄는 어디서 유래할까. 제헌헌법이다. 제헌헌법은 ‘법률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제국주의 시대의 일본제국헌법을 답습했다. 헌법학자 김철수 전 서울대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제헌헌법 제13조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받지 아니한다”고 한 뒤 제28조에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제정은 질서유지와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한다”라며 발목을 잡았다. 유신헌법 제32조2항과 거의 똑같다. 60대 농민이 ‘물대포’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중에 정부는 ‘불법 폭력시위 근절’과 ‘법대로’를 강조하고, 여당 일각에서 ‘시민에 총을 쏴야 공권력’ 발언이 나오는 가운데 1970~80년대식 감수성으로 보도하는 언론을 보니 쓴웃음이 나온다. 유신헌법 때를 빼고 헌법은 개정될 때마다 기본권을 확대하고 강화해왔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만은 왜 여전히 제헌헌법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나. 일제 잔재 일소의 최우선은 대한민국 헌법에 남아 있는 일본제국헌법의 흔적을 쓸어내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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