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직에서 계약직, 하루아침에 6개월 프리랜서로 전락

[창립 51주년 특집]어느 비정규직 프리랜서 PD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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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88년 우연찮게 PD 일을 시작했다. ‘시네텔서울’이라는 외주제작사에서 MBC ‘베스트셀러극장’의 조연출 아르바이트를 맡은 것이다. 방송사라고 해봤자 KBS, MBC밖에 없던 시절. 외주제작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방송 쪽 인력도 풍부하지 않던 때였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 그를 좋게 본 회사는 아예 취직을 제안했고 그렇게 그는 ‘시네텔서울’의 사원이 되었다. 그가 받은 첫 월급은 80만원. 당시에는 대기업 초봉에 가까운 큰돈이었다. 그 때는 그랬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도 없었고 회사가 작건 크건 일을 하면 정규직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이후 27년간의 사회 격변기 속에서 그는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다시 6개월 단위로 계약하는 프리랜서 신분으로 전락했다. 해마다 경력은 쌓여갔으나 근로시간과 노동 강도는 높아졌고 처우는 개선될 기미가 없었다. PD였는데도 그랬다. 프로그램 제작의 중심, 핵심인력인 PD마저 비정규직이 된다는 것은 작가를 비롯한 수많은 스태프들의 고용이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방송 산업 내 수많은 비정규직은 언제 어떻게 양산됐는지, 기자협회보는 그의 삶을 통해 비정규직의 역사를 들여다봤다.




지역민방·케이블TV 출범으로 독립제작사 전성시대
IMF로 어려워진 방송사 외주제작비 삭감·정리해고


1987년에서 1994년에 이르는 기간은 외주제작의 법제화와 지역 민방 및 케이블TV의 출범에 대한 기대로 일정 규모의 독립제작사들이 성장한 시기다. 그가 일했던 ‘시네텔서울’은 1984년 쌍용그룹의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탄생한 독립제작사였고 이후 수많은 제작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이렇게 생겨난 제작사들이 뽑은 인력은 대부분 정규직이었다. 제작과정에서도 제대로 된 처우가 이뤄졌는데 작가, 연기자, 스태프의 인건비와 촬영비용 및 진행비는 표준제작비 규정에 의해 방송사와 계약한 액수보다 평균 20~30%정도 높았다.


한편 방송사 내부에서는 1990년대 이전에도 일용직과 용역, 그리고 계약직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고 이들은 지금과 같이 하나의 꼭지나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했다가 이탈하는 노동력은 아니었다. 방송국이 직접 고용한 일용직의 경우 사측과 매년 재계약을 맺고 기본급 이외의 상여금과 법정수당, 그리고 학자금 지원까지 받았으며 노동조합원으로서의 자격 또한 인정받았다.


한국 사회에서 비정규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는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다. 수입의 대부분을 광고비에 의존하던 방송사들은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갔고 노동시장의 유연화라는 이름 아래 대규모 정리해고가 일어났다. 이 중 방송국에 의해 직접 고용된 비정규직들의 해고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프로그램 외주제작비용도 사정없이 삭감됐다. 이는 독립제작사 경영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고 결국 제작사에서도 정리해고가 이뤄지게 된다. 그가 있던 제작사에서도 메인PD 이외에 모두가 정리해고 대상자가 됐다. 그렇다고 프로그램 제작을 안 할 수는 없는 일. 정규직을 자른 후 제작사가 뽑은 인력은 일일근로의 형식으로 건 당 얼마, 한 달 얼마의 임금을 지불받았다. 정식 근로계약서도 없었고 구두로만 계약이 이뤄졌다. 당시 한 달 임금은 80만원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 방송사의 외주제작 비율은 꾸준히 높아져만 갔다. 외주제작 비율을 맞추기 위해 방송사들은 긴 시간대 프로그램을 외주로 돌렸는데 그 중의 하나가 아침방송이었다. 길게는 2시간 가까이 하는 아침방송은 업무량이 굉장히 많은 프로그램이었다. 짧은 코너가 많은데 각 코너마다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정이 어려운 제작사들은 서로 덤벼들었다. 그가 속해 있던 제작사에서 그는 아침방송 팀장을 맡았다. 아침방송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10~15명의 인력이 필요했다.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제작사는 지출을 줄이기 위해 그나마 남아 있던 정규직마저 모두 계약직으로 전환시켰다. 4대 보험과 퇴직금을 보장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연봉계약직으로 바뀌었다. 반박은커녕 팀장급이라 잘리지 않은 것을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그보다 아래 직원들의 처우는 점점 더 열악해지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인건비 지급 없이 제작비 일부를 받아가는 방식(바우처)으로 고용되는 경우도 잦았다.


비정규직보호법 시행후 프리·건별 계약 일상화
종편 등 방송사 늘었지만 일자리커녕 재하청 심화


1998년 7월 근로자파견법이 제정됐다. 파견 허용 업종으로 분류된 방송사에서는 이후 파견근로자가 전형적인 비정규 고용형태가 되고 만다. 그도 파견회사로부터 오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평생 일거리가 안 떨어지게 해준다는 말에 혹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사실상 파견회사에서 제공하는 인력들은 조연출이나 VJ 등 고급인력이 아닌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파견회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들은 방송 산업에 처음 진입하는 신규 노동력들이었다. 이들은 종종 일이 익숙지 않아 사고를 낼 때가 있었는데 방송사가 돌려보내면 파견회사는 철저하게 이들을 내쳤다. 잘잘못을 떠나 일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도 그러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났다.


2007년 7월 비정규직보호법이 시행되면서 비정규직은 더욱 공고화됐다. 일부는 무기계약직 등 정규직으로 전환됐지만 대다수는 여전히 파견 및 외주화 등 간접고용의 굴레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2년 사용 뒤 정규직 전환 규정도 독이 됐다. 그 전에는 처우를 떠나서 일이라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럴 수 없게 됐고, 제작사에서도 더 이상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 없게 됐다. 2년 동안 정규직과 똑같은 근로조건을 보장하는 것조차 제작사에는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이후 제작사와 근로자의 계약 방식은 무조건 프리계약, 건별계약으로 이뤄지게 됐다. 제작사 안에서의 인력 이동은 더욱 심화됐다. 월 80만~100만원 수준의 임금을 받으며 버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0여년 가까이 한 푼도 올라가지 않은 임금에서 장밋빛 미래는 꿈꾸기 힘들었다.


방송사에서는 2년 시한부의 비정규직 인력을 채용하기 시작했다. 매년 뽑아 1년 일한 직원이 신입을 가르치는 식으로 순환되는 시스템이 도입된 곳도 있었다. 2년 근무 후에 능력이 있는 일부 인력은 바우처 형식의 프리랜서로 계약을 이어갔다. 그도 한 방송사에서 6년째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정규직들과 달리 능력을 인정받아야 지속적인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는 슬픈 운명이다.


이 기간 동안 수많은 케이블 채널과 종합편성채널이 생겨났다. 그러나 일자리가 늘어나기는커녕 재하청의 구조는 더욱 심화됐다. 그는 노동환경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채널이 아무리 늘어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은 꿈을 안고 방송사에 들어가 2년 후 내쳐지고 좌절하는 청년들의 모습이다. 꿈을 꾸는 이들은 많은데 이들을 소화할 수 있는 방송 노동 환경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기성세대로서 후배들에게 죄책감이 크다고 말했다. “최소한 근로기준법에 의거한 표준계약서가 마련돼야 합니다. 일을 시켰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처우를 개선할 수 있는 인권 감시 기구도 필요하죠. ‘어쩔 수 없이’라는 말로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려 하지 말고 정도를 지키는 노동환경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의 절규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현실은 당연한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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