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에 취한 워싱턴과 한국외교

[스페셜리스트 | 외교·통일]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

벚꽃에 흠뻑 취해버렸다. 벚꽃 마츠리(벚꽃축제)에 들뜬 일본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미국의 워싱턴DC를 놓고 하는 이야기다.


매년 4월 워싱턴은 벚꽃에 휩싸인다. 워싱턴시 주위를 흐르는 포토맥 강을 따라 3700그루가 피워내는 벚꽃 물결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워싱턴 시민과 관광객들은 이 화려하고 이국적인 꽃을 보며 봄의 정취를 만끽한다. 매년 시 관광 수입의 35%를 벚꽃축제 기간에 거둬들일 정도로 워싱턴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워싱턴의 벚나무들은 미국 대륙에는 없던 식물이다. 일본산 벚나무가 워싱턴에 들어온 것은 불과 73년 전이다. 도쿄시가 1912년 워싱턴에 3020그루의 벚나무를 기증하면서 포토맥 강변의 벚꽃 역사가 시작됐다.


당시 영부인이었던 헬렌 태프트 여사는 백악관 입성 전인 1907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때마침 활짝 핀 벚꽃을 보고 그 아름다움을 칭찬했다고 한다. 


이를 지켜봤던 일본 측이 5년 후 태프트 여사가 영부인이 되자 벚나무 묘목을 워싱턴으로 보내 축하했다. 실제로 태프트 여사는 벚나무를 포토맥 강변에 처음으로 심은 인물이다. 


그녀의 남편 윌리엄 태프트 대통령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그는 미 육군장관 시절인 1905년 을사늑약을 앞두고 미국과 일본이 필리핀과 한국의 보호권을 서로 인정해주는 내용의 가스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했던 당사자다. 


일본 입장에서 보면 조선 지배를 승인해준 고마운 은인인 셈이다. 그런 친일파 대통령 부부에게 미·일간 ‘외교 밀월’을 이어가자는 뜻에서 보낸 상징적 선물이 바로 워싱턴의 벚나무들이다.


최근 미·일 외교를 보고 있으면 워싱턴에 만발한 것은 단지 식물 벚꽃뿐만이 아니다. 일본은 워싱턴에 또 다른 벚꽃을 심는데도 성공했다는 느낌이 든다. 막대한 자금력과 집요한 외교력을 결합해 전후 70년간 미국 내 정관계 곳곳에 ‘벚꽃’(친일파)을 번성시켰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국무부와 국방부, 재무부 인사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친일파로 채워져 있다. 


특히 국무부의 동아시아정책을 총괄하는 동아태 차관보 자리는 늘 일본통의 몫이었다. 부시 정부시절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 짐 캘리 동아태 차관보, 그리고 오바마 정부의 커트 캠벨 전 차관보와 대니얼 러셀 현 차관보 등이 모두 내로라하는 친일파다.


이들은 주요 외교 정책에 있어 미국의 국익 다음으로 일본의 입장을 고려한다. 재팬스쿨의 대부로 불리는 아미티지는 지난 2000년 10월 ‘아미티지-나이 보고서’를 통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발동을 금지한 일본 ‘평화헌법’ 제9조의 제거를 주장해 일본 우경화의 물꼬를 터준 인물이다. 그의 후배들인 미 국무부 인사들이 일본의 우경화와 군사대국화 추진을 심심찮게 감싸고 도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난주 이뤄진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 외교는 이런 의미에서 워싱턴에서 벚꽃 마츠리를 즐기고 돌아온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아베 총리가 버락 오마바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이나 상·하의원 합동연설에서 과거 제국주의 침략 전쟁과 식민 지배의 피해국인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에 대해 분명한 사과 없이 넘어갔는데도 미국이 너그러운 표정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이들 ‘벚꽃의 힘’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벚꽃 심기는 이제 워싱턴을 뛰어넘으려 한다. 일본 정부는 최근 미·일 인적교류 프로그램인 ‘가케하시 주도’에 30억엔(약 270억원)을 투입한다고 밝혔다. 


가케하시는 우리말로 ‘가교(架橋)’를 뜻한다. 이제 정치인과 관료뿐 아니라 고등학생과 대학생, 교사, 연구원, 문화계 인사들과도 교류를 증진해 미국 내에서 일본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더욱 많이 길러내겠다는 계획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미·일 간 신 밀월시대는 그저 ‘한·미 동맹은 굳건하다’라는 틀에 박힌 답변으로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벚꽃에 흠뻑 취해버린 워싱턴을 향해 우리 외교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동진 세계일보 정치부 차장의 전체기사 보기

배너

많이 읽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