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과 언론

[언론다시보기] 변상욱 CBS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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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상욱 CBS 대기자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을 감추기 위해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논란이 커지고 검찰이 등 떠밀려 수사에 나섰다. 정치권력은 늘 숨길 것이 많다. 정치권력은 자신들의 힘을, 정의를 지키는 공권력으로 쓰기도 하지만 이권과 이득을 위해 편법과 탈법,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권력의 은폐는 흔히 세 가지 차원에서 벌어진다.

1. 권력의 정체 자체를 감추는 은폐가 있다. 국가 권력을 실제로 장악해 좌지우지하는 핵심세력을 노출시키지 않으려 한다. 당연히 대통령이 포함되고 정부조직법에 따른 서열과 위계가 있지만 대통령의 주변을 둘러싸고 정보를 거르고 차단하며 자기들의 분석과 판단을 대통령에게 주입하는 세력이 있을 때 당연히 자신들을 감춘다.

2. 권력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 남용과 불법적 비위 사실은 당연히 감춘다. 흔히 권력의 은폐 하면 떠올리는 것이 비리의 은폐이다.

3. 권력은 국민을 은폐하기도 한다. 국민이 모이고 뭉쳐서 힘이 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국민이 모일 장소와 소통할 채널을 묻어 버린다. 광장을 못 쓰게 하는 것도 방법이고 집회시위법을 남용하기도 한다. 트위터 등 소통의 도구를 규제하고 묶는다. 노동자가 뭉치려 하면 좌파용공이라고 차단막을 친다. 노동자들을 돕겠다고 나서는 희망버스도 구속 대상이다.

권력의 이러한 은폐들을 모두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 민주 정치의 진정한 발전이 가능하다. 정치권력만 은폐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금권을 쥔 자본권력도 은폐 엄폐에 능하다. 이번에 삼성전자가 공정거래위원회의 불공정 행위 조사를 정문에서 붙잡아 시간을 끌고, 자료를 폐기하고, 출장 중이라며 따돌리는 등 치밀하고 담대하게 방해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는 삼성의 권력이 정부 조사쯤은 우습게 여길 만큼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언론이다. 지난 12일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에서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이명박 대통령을 초청해 마주 앉았다. 언론사 보도책임자들이 수십 명이다. 그러나 누구도 민간인 사찰과 배후, 은폐조작에 대해 묻지 않았다. 우리 언론의 현주소이다.

삼성전자의 공정거래위 조사 방해 사건도 그 내용을 상세히 전하거나 엄중하게 질책한 언론은 일부에 불과했다. 이것이 그렇게도 외치던 공정성이고 객관성이고 중립성일까? 이렇게 협조적인 언론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뭐가 아쉬워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먼저 비리를 실토하겠는가.

브룩 글래드스톤의 신작 ‘미디어 씹어 먹기’의 ‘대단한 거부’ 편에는 기자들을 향한 신랄한 비판이 줄줄이 이어져 나온다.

“신념을 분명하게 밝히는 기자는 거의 없습니다. 공공의 이익이라고 믿는 것을 위해 온 힘을 다하겠다는 기자들은 더욱 적습니다. 틀림없이 심각한 도덕적 위기의 시대라 할 수 있는 현재도 대부분의 기자들은 대단한 거부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단한 거부’란 예이츠가 저널리스트에 대해 단테의 신곡(‘나는 비겁함으로 인해 대단한 거부를 했던 그의 어두운 얼굴을 보았다’)을 인용해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J F 케네디 대통령도 단테의 신곡을 인용해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유지하는 자들을 위해 비워져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물론 글래드스톤이 언급한 J F 케네디 대통령의 단테 인용은 정확지 못하다. 단테의 신곡은 이렇게 되어 있다.
“치욕도 없고 명예도 없이 살아온 사람들의 사악한 영혼들이 저렇게 처참한 상태에 있노라.”

뜨거운 지옥이든, 처참한 상태든 오늘 우리 언론을 향한 뼈아픈 지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언론은 권력으로 둘러 친 차단막 뒤에 숨어 국정을 농단하는 은밀한 권력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 한다. 따져 묻고 캐내고 분석해내야 한다. 그래야만 권력이 국민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된다. 그것은 지식인들의 책임이고 사명이다.

그렇게 권력을 흔들고 틈을 벌려 깨고 들어가 파헤칠 때 체제 내부에서 변동이 이뤄지고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린다. 이를 이루지 못하면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의 민주공화국 조항은 사문화된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변상욱 CBS 대기자의 전체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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