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공채 6기로 들어갔는데 수습기간이라고 6개월은 월급을 절반인 1만5천환씩만 줬었지”
제1회 신문의 날 기념식이 열린 1957년에 수습기자로 신문사에 입사해 30여년을 언론인으로 활동한 제재형(70)씨는 50년대에서부터 80년대 후반까지 다양한 언론계 일화들을 털어놨다.
제씨는 “당시만 해도 신문에 투신한 젊은이들은 일제시대 선배들 같은 ‘우국지사’ 분위기가 짙게 남아 있던 시절이라 ‘정론직필’을 통해 민중을 계도하고 세상을 밝힌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개인적으로는 동아일보에 ‘조류’라는 독자투고란에 ‘제절로’라는 필명으로 보낸 글이 인쇄된 경험에서 활자의 매력을 느낀 것도 신문기자가 된 이유”라고 밝혔다.
당시에는 마감에 임박한 상황에는 전화기를 이용해 기사를 불렀고 각 출입처에서 텔렉스를 이용해 알파벳으로 한글을 소리가 나는 대로 타전해 기사를 송고하기도 했는데 이를 정확하게 풀어서 다시 쓰는 것도 큰 일거리였다고 회상했다.
출입처 기자실 풍경은 “방송기자는 따로 기자실이 있었는데 중앙지와 지방지 신문기자실은 공간이 넉넉했지만 방송기자들은 공간이 너무 작아서 가져온 장비를 놓기에도 고생스러워 보였다”고 회고했다.
당시만 해도 언론계가 신문 우위(?)의 상황이라 방송기자가 정부발표나 취재원 곁에서 마이크를 가까이 가져가면 “야, 아이스케키통! 빨리 치워”라는 고참기자들의 고함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이는 당시 방송기자들이 매고 다닌 녹음기 본체의 모양과 크기가 당시 아이스케키 장사들이 들고 다니던 얼음통과 비슷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공화당 출입시절 정치가 K씨는 자신의 명함에 도장을 찍어서 기자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이는 당사 앞 술집에서 ‘10만원’어치 술과 안주를 마시고 먹는 쿠폰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이를 술집마담에게 주고 9만원 정도로 ‘현금화’하는 기자들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은 바로 술값으로 명함을 지불(?)했다.
외신의 경우도 텔렉스를 이용하다보니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대형사고가 생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중국의 정치가 주은래가 사망한 소식이 당직기자 교대시간과 맞물려 낙종을 한 한 일간지는 당직기자가 회사를 떠나야 했던 경우도 있었다.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국제우편’을 통해 편지로 기사를 보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방송 후에 앵커로 이름을 날린 B씨의 경우 시카고 유학을 하며 통신원 자격으로 기사를 보냈는데 시차로 인해 달라지거나 틀린 부분을 그때그때 편집국에서 다시 ‘각색’을 해줘야 했다는 것
60년대 군정이 시작되고 언론에 대한 정권의 탄압이 노골화 되면서 기자들 사이에 ‘국립호텔 남산분실’로 불리던 중앙정보부에 숙박(?)을 하는 일도 종종 생겼는데 “밥은 그럭저럭 잘 주는데 잠은 잘 안 재우는 것이 그 호텔 서비스의 특징”이었다고 한다.
제씨는 “돌아보면 가장 잊혀지지 않은 인물이 한국일보의 설립자 故장기영씨”라며 일화를 소개했다.
한번은 1기 선배부터 막내인 6기까지 편집국 의견을 모아 임금 30% 인상과 구내식당 개선 등 요구조건을 담은 ‘결의문’을 장 사장 방으로 가져갔으나 읽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이런 거 없어도 신문 만드는데 지장이 없다”며 호통을 친 후 기자들을 방에서 내몰더니 다음 날 바로 요구사항을 들어 줬다는 것이다.
‘막내’ 제기자가 몰래 문틈으로 훔쳐본 바로는 장 사장은 기자들이 방을 나가자마자 쓰레기통에 던졌던 종이를 챙겨서 읽더라는 것.
그는 요즘 신문을 보면 “글자는 기자의 탄환이라는 말을 가슴에 둬야 한다”며 “그만큼 글이 무서운 힘이 있고 또 총알처럼 아껴서 써야 한다는 의미”라며 “아낀 총알은 ‘지면’으로 활용해 기사를 더 실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요즘 신문기사들을 보면 후배 들이 조금 더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기사를 섰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곤 한다”는 충고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