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정달영씨는 <신문과방송> 7월호 ‘시일야방성대곡, 또 다른 슬픔’이란 글에서 “항일 언론의 상징이 된 위암이 말년에 친일로 돌았다는 뜻밖의 사실은 지식인의 변절이란 점에서 또 한번의 충격”이라며 지난 3월 경남도민일보가 위암 장지연 선생의 친일 행적을 특집 보도한 내용을 소개했다.
경남도민일보는 지난 3월 1일자 ‘위암 장지연 선생(1864∼1921)의 친일행적을 파헤치다’란 특집물에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실린 위암의 글을 인용하면서 “위암의 친일은 15년부터 18년까지 꾸준히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한 사례로 “일체 연합주의를 채택하고 아시아먼로주의를 널리 퍼뜨려 외환을 방어하고 동양이 하나로 단결하여(…)”라는 요지로 매일신보에 쓴 위암의 글을 게재하고, 동양 평화를 지키려면 아시아의 맹주인 일본을 중심으로 아시아주의를 실현해 백인종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풀이했다. 또 “(조선총독부의 물산공진회에 대해) 쓸모없는 것을 없애고 농공실업을 장려하여 진보한 성적을 모두 진열한 것”(1915. 1. 1) “(순종의 일본 방문을 두고)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1917. 6. 8) 등의 글을 문제 삼았다.
위암은 1905년 황성신문에 일제의 을사조약 체결을 비판한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해 옥고를 치렀으며, 1910년에는 경남일보 주필로서 매천 황현의 ‘절명시’를 실어 일제에 저항하는 등 대표적인 항일언론인으로 존경받아왔다. 경남도민일보는 그 이후 위암의 행적을 비판하고 있다. 기사를 쓴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기자는 “박노자 교수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에서 위암의 친일행적을 읽고 취재를 하게 됐다”며 “매일신보에 실린 위암의 글을 분석하면서 말년에 친일을 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김도형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위암의 친일행적은 학계에서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지난 2000년 6월 ‘한국사연구’에 실은 ‘장지연의 변법론과 그 변화’란 논문에서 “위암이 동양의 유일무이한 최상책이라고 한 범아세아먼로주의는 사실상 일본의 침략 이데올로기였던아시아주의를 수용한 것으로 식민지배를 긍정한 귀결”이라고 주장했다.
위암 장지연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내부에서 위암의 친일행각이 논의된 적은 없었다”며 “한두 대목으로 총체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위험하고, 평가는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