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들어서 유난히 많은 부음이 날아들었다. 그동안 나누었던 인연을 갈무리하고 돌아오는 밤길은 언제나 허전하고 심란하기 마련이다. 가야할 먼 길을 남겨두고 어느 날 갑자기 이승의 연을 끊은 이들과 이별하고 돌아오는 길은 더욱 그렇다. 평론가 이성욱이 그랬다. 불과 두 달 전에 항일유적지를 찾아 함께 중국을 여행했던 그가 중환자실에 누워있다는 소식도 놀라웠는데, 바로 그 다음 날 그 소식은 부고로 바뀌어 날아들었다.
한 사람이 지닌 공간과 그 공간을 데워온 따스한 온기는 마치 공기와 같아서 그가 곁에 있을 때는 쉽게 느끼지 못한다. 나같이 무딘 사람은 더욱 그래서 이성욱이 떠난 다음에야 그가 우리 문학과 문화계에 얼마나 보석 같은 존재였는지를 실감한다. 이 느낌은 내가 그와 각별히 가까운 사이여서 비롯되는 상실감 때문이 아니다. 이성욱을 잃은 상실감은 내게 사적인 것인 동시에 공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성욱의 재능과 역할은 우리의 문화예술계에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를 문학평론가라고 하지 않고 그냥 평론가라고 지칭하는 이유도 그가 문학평론가로 출발하였지만 어느 장르의 칸막이에도 갇히지 않는 드넓은 영토를 지닌 예술적 지성인 동시에 현장에서 발을 떼지 않는 ‘딴따라’였기 때문이다. 그의 풍부한 독서량은 자신의 문학적 체험과 일체를 이루고 있어서 어떤 작가와 이론가도 그의 눈을 속이기 어려웠다. 영화와 음악, 만화, 스포츠에 이르기까지 그의 발길과 시선은 넓게 이어져 있었고, 그것들은 모두 그가 정말로 좋아했던 것들이었다. 고급예술이 어떻게 대중과 연결될 수 있는지를 알려주었고, 대중예술이 내장한 사회적 맥락을 알려준 것도 그였다. 우리 사회의 오랜 미덕이라고 하는, 떠난 자에 대한 의례적인 덕담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난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의 문화예술계는 장르의 칸막이가 지금처럼 두텁고 높지는 않았다. 전문화와 세분화가 사회의 흐름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영역은 어떨지 몰라도 문화예술은 열려있어야 하고 장르를 넘어 소통하려는 태도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장르를 넘어서면 아무것도 모르는 예술가는 예술가가 아니라 기술자에 가까워진다.
지식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자신과 세상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능력을 상실하는 현상을 일찍이하이데거는 ‘존재의 망각’이라고 문자화한 적이 있다. 대학에서도 예전에는 문창과와 회화과, 연영과 학생이 함께 어울려 술을 마셨는데 요즘은 시 공부하는 학생과 소설 공부하는 학생끼리도 잘 어울리지 않는다. 장르를 넘어 예술 전체를 조망하는 동시에 세부장르의 시시콜콜한 추문들까지 그것과 연결시킬 수 있었던 이성욱의 자리는 앞으로도 아마 오래 채워지기 어려울 것이다.
신문의 가장 눈에 잘 띄지 않는 지면에 부음란이 있다. 유명하거나 유력한 인사의 부음은 가끔 사회면에 자리를 잡기도 하고 조사들이 실리기도 한다. 벌어놓은 돈의 양과 살아생전 누렸던 권력의 크기, 아니면 그 자식들의 지체가 한 사람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마지막 기준이 되어야 할까. 글쓰기 기술자들의 교언영색과 하나마나 한 얘기가 태반인 이른바 ‘오피니언’의 칼럼 대신에 한 주에 한 번이라도 살아생전 세상에 다른 가치를 남기고 떠난 사람들의 삶을 고정란으로 삼을 수는 없을까. 그것을 통해 어떤 삶이 아름다운 삶이었는지를 우리가 생각해보게 되지 않을까. 그리고 또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사라져갈 사람들이라는 것을 상기하면 세상에서의 하루를 조금은 덜 뻔뻔하고 조금은 더 너그럽게 보내게 되지 않을까. 고정란의 이름은 ‘사람의 흔적’이라고 하면 어떨까. 아파트 시세표 실을 공간이 부족해서 안될까. 지면이 너무 칙칙해져서 안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