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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남영동에 끌려갔지만, 그 뒤엔 백지처럼 할퀴어진 기자협회보가 남아있었다"

[기자협회보와 나] 안양로 전 기자협회보 기자

안양로 전 기자협회보 기자  2020.09.24 13: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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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로 전 기자협회보 기자 1980년 ‘민주화의 봄’ 마지막 한 달, 40년 전의 일들이 불과 며칠 밖에 되지 않은 듯 생생하게 기억난다. 유신시절 내내 악의적인 언론보도에 시달려 왔던 민주진영에서 민주언론에 대한 욕구가 유달리 강했던 그 시점, 평소 존경하던 김태홍 선배(2011년 작고)가 기자협회장이 되었고, 언론민주화의 기치를 세우는데 나도 함께 동참하자고 제안해왔다.


나의 첫 업무는 기자협회가 주최했던 강연을 원고지에 옮기는 일이었는데, 당시 강연들은 오랫동안 권력에의 굴종으로 일관해 온 언론인의 지적 수준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반면에 당시의 해직기자 및 진보학자들은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기자들에게 권력 주변의 어둡지만 안일한 그늘에서 과감하게 벗어나서 민중의 편에 서기를 촉구하고 있었다.


거의 모든 언론사의 젊은 기자들이 앞다퉈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 내용은 한결같이 권력의 대변자 역할을 해 온 과거를 반성하고, 민주언론의 탄생에 앞장서겠다는 것이었다. 기자협회보는 성명서를 담는 데에도 지면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기삿거리만 많으면 신문은 저절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김 회장은 젊은 기자들과의 은밀한 회합에 되도록이면 나를 동행했다. 그때마다 그들의 가슴 속에서 끓고 있는 민주언론에 대한 열망과 결의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과 방송에는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의 언론은 여전히 유신시대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기자협회보는 최대한 발행부수를 늘렸고, 전국의 대학가에 살포되었다. 민주화의 전열이 좀 더 견고한 대학가에서 젊은 기자들을 응원하는 소리가 들리고 연대 행동까지 취해진다면, 언론민주화에 시동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학생들이 어느 한 언론사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다음 표적은 어느 신문, 어느 방송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언론계가 바짝 긴장하기도 했다.


기자협회에 출근한 지 한 달, 기대에 없던 보너스를 두둑하게 받았다. 나는 김 회장에게 “이거 위험수당인 모양인데, 너무 적어요!”라며 고마움을 표시했고, 그는 쓴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김 회장도 나도 민주화운동이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전략도 없이 위태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0·26으로 유신체제가 종말을 고하자 언론계에서는 평기자 중심으로 검열 철폐와 자유언론 실천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봇물 쏟아지듯 일어났다. 사진은 1980년 5월 한국일보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검열 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모습. /한국일보 40년사 제공

5·17 계엄령 선포 이후 기자협회 회장단과 거기에 덤으로 붙은 나까지, 이렇게 여섯 명이 남영동으로 잡혀갔는데, 우리 뒤에는 검열에 할퀴어져 백지나 다름없는 기자협회보가 의연하게 남아 있었다. 그 협회보는 민주화운동의 한 켠에서 젊은 기자들의 열망과 군부의 억압이 얼마나 거세게 충돌했는지, 그리고 김 회장을 비롯한 협회 간부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헌신적으로 활동했는지 잘 암시해주고 있었다. 여백의 미를 실감하면서 당시의 협회보가 새삼 자랑스럽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1989년 노향기 기자협회장으로부터 협회보의 전면적 쇄신에 동참해달라는 제안이 다시 왔다. 노 회장은 이미 1980년 남영동에서 당했던 심한 고문 후유증으로 거의 10년이 지나도록 극심한 허리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던 차다. 당시 노 회장은 또 하나의 군사정권에 지나지 않는 노태우 정권을 위해 비합리적으로 편파적 보도를 일삼고 있는 한국언론을 곱게 보아줄 생각이 없었기에 협회보가 좀 더 비판적이기를 원했다.  


전두환 집권 시기에는 경제성장률이 유례없는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면서 경제성장률은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비정상에서 정상으로의 복귀’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그러나 노 정권은 ‘국민들의 과소비’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노라는 해괴한 논리를 폈고, 언론은 앞다투어 이 논리를 전파시켰다. 과소비가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볼 여유조차 없이 언론은 바빴다. 그때에도 올해처럼 장마가 심했고, 이로 인한 피해가 전국에서 속출했다. 당시 언론은 하늘에만 책임을 돌릴 뿐, 인간들에게는 잘못이 없는지 살펴보려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논쟁으로 권력자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을 만큼 언론은 조심스러웠다.


고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 당시 ‘경제정책의 실패로 인해 몰락한 통치자’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었을 그 시점, 뒤이은 전·노 두 정권은 만성적 통치이념의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신격화시키기 시작했고, 여기에 언론매체들이 경쟁하듯 동참했다. 빈부격차는 날로 심해지면서 개혁의 꿈은 사라졌는데, 절망한 대다수 국민은 죽은 박정희라도 마음 속에서 되살려 위안을 느끼고 싶어 했다. 국민들의 허위의식과 언론의 노력이 만났고 결국 박정희의 경제부흥 신화작업은 성공적이었다.


이런 지적이 아니어도 한국 언론의 퇴행적 행보는 아주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기자협회보는 논쟁을 즐기기보다는, 마땅히 고려되어야 할 것은 고려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반대 논리를 제시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기자협회보는 한국 언론의 살아있는 역사를 고스란히 비춰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금광석 속에 많든 적든 금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지령 2000호를 기념하는 기자협회보에도 한국 언론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 암시가 함께 담겨져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