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영 기자 2020.05.13 15:47:15
건강 이상설에 이어 사망설까지 나왔던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일 건재함을 과시하면서 온갖 추측성 보도와 억측은 허위정보였음이 드러났다. 그동안에도 ‘북한 관련 보도는 특종 아니면 오보’라는 냉소적 평가가 있었지만 또 한 번 고질적인 병폐가 드러난 셈이다. 특히 국내외 언론사를 가리지 않고 각종 억측이 보도로 확산됐다는 점, 일부 정치인과 북한 전문가들 역시 허위정보 확산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을 두고 특단의 대책과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이번 사태는 김 위원장이 지난달 11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주재한 이후 공식 석상에서 잠적하고, 심지어 북한의 최대 명절인 태양절에 금수산태양궁전 참배에 불참하면서 시작됐다. 김 위원장의 이례적인 행보에 다양한 설이 돌았고 지난달 20일 데일리NK가 김 위원장의 심혈관 시술 내용을 보도하면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게다가 CNN 역시 건강 위중설을 제기하고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 등이 신변 이상설을 확신하며 관련 기사가 폭증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뉴스 빅데이터 분석시스템 ‘빅카인즈’(BIG KINDS)를 통해 ‘김정은 건강’이 언급된 기사 건수를 살펴보면 지난달 11일부터 5월1일까지 총 54개 신문·방송사에서 1711건의 기사가 쏟아졌다.

이 중 일부 보도는 ‘확인되지 않은 정보’임을 전제하거나 정보 출처를 검증하며 건강 이상설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박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보도는 검증 없이 관련 내용을 증폭하는 데 기여했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가 지난 11일 발간한 ‘북한 관련 허위정보 실태와 대응’ 보고서에 따르면 연구자들은 이번 사안에서도 대북 ‘가짜뉴스’의 전파 패턴이 그대로 적용됐다고 분석했다. 국내 특정 언론사나 전문가, 탈북자 또는 해외 언론이 의혹을 제기하면 기성 언론을 중심으로 허위정보가 전파되고 정치권과 전문가가 가세해 내용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또 이들의 발언을 언론이 상호인용하고 재생산하면서 한 번 더 의혹이 확산되고 최초 제기된 문제 외의 내용들과 결합해 내용이 변형되고 증폭된다고 보고서는 밝혔다.
북한 문제를 오래 다뤄온 한 전문기자는 “이번에도 고질적인 문제들이 드러났다”며 인용 저널리즘과 조건으로 시작되는 기사들을 지적했다. 이 기자는 “기성 언론이 기사의 신속성을 위해 지성호나 태영호 같은 사람들의 얘기에 권위를 부여해 인용·전달했는데, 주장 뒤에 숨어 허위정보를 확대·재생산한 행태”라며 “조건으로 시작되는 저널리즘도 문제다. ‘김정은이 죽었다면’ 등의 조건을 달아 굉장히 자극적이거나 소설에 가까운 얘기들을 기성 언론이 거리낌 없이 보도했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특히 이번 사안의 경우 충분히 분석과 판단이 가능한 상황이었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데일리NK 보도가 나왔을 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보통 북한과 관련한 정보는 검증에 한계가 있기에 현재의 징후와 과거의 경험적 사례를 핵심적 근거로 활용한다”며 “최고지도자의 시술을 향산진료소에서 했다는 점, 또 유고 상황이라면 남북 접경지역에 특이 동향이 나타나거나 평양 특파원, 외교관에 대한 통제가 들어가야 하는데 전혀 징후가 없었다는 점 등으로 미뤄 해당 보도는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이러한 주장을 언론이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문희 시사IN 한반도전문기자도 “북한 보도에서 추측을 배제하라면 아무것도 쓸 수가 없겠지만 적어도 정보에 개연성이 있는지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며 “특히 이번 사안의 경우 우리 정부의 판단이 어떨지가 중요했다. 사태 초반부터 이례적으로 정부 쪽 입장이 ‘오보’로 확고한 걸 보면서 이 사안은 우선 지켜보는 것이 가장 상식적이고 정확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다만 CNN을 비롯해 로이터, 블룸버그 등 외신들이 잇따라 관련 보도를 내놓으며 국내 언론이 이를 안 받을 수 없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이에 대해 김현경 MBC 북한전문기자는 “CNN의 북한 보도가 너무 고평가된 측면이 있다. CNN은 우리와는 다른 사실 확인을 거쳤을 거라고 사람들이 믿는데, 사실 미국 내에서도 북한 관련 가짜뉴스에 대한 논란이 있다”며 “이번에도 CNN 보도 이후 즉각적으로 취재원에 관한 비판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이를 국내 언론이 그대로 인용 보도한 것은 우리 언론의 현주소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북한 관련 보도가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커져 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를 계기로 언론을 비롯한 관련 전문가들이 깊은 성찰을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북한 관련 보도 준칙을 제정하는 한편 언론사 스스로 자정 기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며 “북한 정보를 분석하고 판단하는 역량을 강화해 최대한 검증할 수 있는 자체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전문가들 역시 북한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식과 토론이 이뤄질 수 있도록 언론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