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 기자 2019.10.29 23:56:56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아내 정경심 동양대 교수가 검찰 수사 58일 만에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정 교수의 얼굴 공개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뜨겁다. 정 교수를 공인으로 볼 수 있는가에서 시작된 논란은 공인의 기준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피의자의 인격권 보호를 위한 실효적인 방안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언론계에 던져주고 있다.
정 교수는 지난 23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에 출석하며 포토라인에 섰다. 정 교수의 사진이 재직 중이던 대학 홈페이지 등에 공개된 상태이긴 했지만, 공개된 자리에서 언론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TV에선 정 교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법원 출석 현장을 생중계한 방송사들을 포함해 지상파·종편·보도채널 등 모든 방송사는 정 교수의 얼굴을 ‘블러(blur·흐림)’ 처리해 보도했다. 신문은 반으로 갈렸다. 다음 날 새벽 정 교수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국민·동아·세계·조선·중앙일보는 정 교수의 사진을 1면 등에 모자이크 없이 보도했다. 반면 경향·서울·한국일보는 모자이크나 블러 처리를 했고, 한겨레는 뒷모습 사진만을 실었다. 통신사 중에선 뉴시스만 정 교수의 얼굴을 공개했다.
포토라인에 선 피의자를 보도하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모자이크 처리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특히 TV에서 생중계하면서 블러 처리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 과정에서 언론사마다 판단 기준이 달랐던 것은 물론, 뉴스룸 안에서도 찬반양론이 팽팽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공개 여부를 가른 쟁점은 두 가지다. 정 교수가 공인이냐 아니냐와 촬영에 동의했는지다. 국민일보는 정 교수가 “마스크나 선글라스 등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포토라인에 서서 취재진을 향해 “재판에 성실히 임하겠다”고 분명히 밝힌 점을 볼 때 사진촬영 거부 의사를 표현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른바 ‘묵시적 동의’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정 교수가 포토라인을 지날 때 변호인 측에서 초상권 보호를 요청했다는 현장 기자의 증언도 있다. 상당수 언론은 이 같은 요청을 받아들여 정 교수의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정한 인권보도준칙 등은 ‘공인’이 아닌 개인의 얼굴 등 신상 정보를 공개할 땐 원칙적으로 당사자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 ‘공인’이란 개념이다. 공인에 대한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 보니 판단도 제각각이다. 흔히 고위 공직자나 국회의원, 연예인 같은 유명인 등을 공인 또는 공적 인물로 분류하는데 통념상 정 교수는 여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따지고 보면 ‘공인’을 남편으로 둔 사람일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래서 정 교수가 검찰 수사 대상이 됐고, 전 국민의 이목이 쏠린 사건의 주인공이 됐다. 이처럼 대중의 공적 관심사와 관계된 ‘시사적 인물’의 경우 공인에 준하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따라서 얼굴 공개도 가능하다는 것이 찬성 쪽 논리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변호사는 “조 전 장관이 주식 투자와 자녀의 대학입시에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 고위공직자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한 게 확실해진 다음이라면 관련자를 공개 보도해도 상관없지만, 지금은 거꾸로 조 전 장관의 관여 여부가 밝혀지기 전에 딸 문제와 정 교수 문제가 불거져 세상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선 것”이라며 “지금 시점에서만 보면 그 과정이 정당했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고 말했다.
국정농단 사태와 비교해 얼굴 공개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쪽도 있다. 지난 23일 유일하게 정 교수의 정면 사진을 보도한 조선일보는 “과거 국정 농단 사건에서 일반인이었던 최순실씨와 딸 정유라씨 모습도 모두 공개됐다. 그런 점을 고려해 본지는 정씨 모습을 공개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국정농단 당시 최순실씨와 그의 딸 정유라는 물론 입학비리와 학점 특혜 혐의로 구속된 이화여대 교수들의 얼굴도 모두 언론에 공개됐다. 사진기자협회 등이 10여 년 전부터 합의하고 지켜온 ‘수의(囚衣) 촬영 금지’라는 원칙이 깨진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정 교수가 받는 혐의를 국정농단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며, ‘형평성’을 이유로 과거의 보도 행태를 답습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동희 한국사진기자협회장은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법과 제도적으로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발맞춰 나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만 이번 일을 계기로 ‘일관된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우상욱 SBS 사회부장은 정 교수 건에 대해 “대단히 이례적으로 애매한 상황이기 때문에 보다 인권적인 측면을 고려해서 판단했다”고 설명하며 “앞으로 이 정도 허들이 공인을 판단하거나 얼굴을 공개하는 기준이 돼야 하지 않겠나. 기존보다 공인의 기준이 높아지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원상 한국영상기자협회장도 “알권리라는 게 사실 호기심 충족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면서 “알권리를 내세워 공인의 기준을 넓히다 보면 초상권을 보호할 수가 없다. 피의자의 인격권을 존중한다는 대원칙을 견지하며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