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 기자 2019.10.02 14:45:20

영구 미제사건으로 남을뻔했던 화성 연쇄살인 사건의 진상이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사건 발생 33년 만에 경찰이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한 데 이어 그간 범행 일체를 부인해왔던 용의자가 자백을 한 사실이 1일 확인됐다. 지난달 18일 채널A 첫 보도로 용의자 특정 사실이 알려진 지 14일 만이다. 경찰은 다음날 기자회견을 열어 총 3건의 현장 증거물에서 검출된 DNA와 일치하는 대상자가 있다는 통보를 받고 수사 중이라고 밝힌 바 있다. 경찰은 다만 “용의자가 50대의 이모씨이고, 현재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는 사실 외에 자세한 신원은 공개하지 않았다. 용의자의 신원이 공개된 것은 역시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다. 이미 이날 동아일보가 조간신문 1면에서 “강간 살인죄 무기수로 복역 중인 이○○”라고 실명을 공개했고, 이후 용의자 이씨의 신상과 복역 중인 사건에 관한 언론 보도가 경쟁적으로 쏟아졌다. 이씨의 이름은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올랐다. 이름은 물론 고등학교 졸업앨범 속 실제 사진도 공개됐다. 경찰이 공식적으로 시인하지만 않았을 뿐, 이 씨의 신원은 사실상 전 국민에 공개된 셈이다.
이씨의 신상을 공개한 언론사들이 강조하는 것은 ‘국민의 알 권리’다. 비록 진범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고,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지만, 33년 만에 특정된 용의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공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이다. 한국일보는 지난달 25일 이씨의 고교 졸업앨범 사진을 공개하면서 “개인정보보호보다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이고, 최장기 미제 사건이었던 화성연쇄살인사건과 알려지지 않은 다른 미제사건들 해결의 단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 착안, 사진을 공개키로 했다”며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채 몽타주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정곤 한국일보 사회부장은 “미궁에 빠져 있는 연쇄살인 사건의 경우 (용의자를) 공개하는 것이 실체적 진실 확인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다”면서 “다만 사진 등을 공개하기 전에 크로스체크 등 충분한 확인 절차를 거쳤다”고 설명했다. 지상파 3사 중 유일하게 처음부터 실명 보도를 해온 MBC의 박성제 보도국장도 “편집회의 내부 논의를 거쳐 알권리에 속한다는 결론을 내렸다”면서 “DNA 검사는 다른 혐의와 달리 틀릴 확률이 낮고 강력범이라는 점 등을 고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신상공개에 신중한 언론사도 적지 않다. 9월30일 기준 전국 단위 11대 종합일간지 가운데 실명보도를 한 신문사는 동아·문화·세계·조선·한국일보 등 5개사뿐이었다. 지상파에선 KBS와 SBS가 익명 보도 원칙을 지켜왔다. 우상욱 SBS 사회부장은 “일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면 용의자 단계에선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이름을 밝히는 게 사회적으로 어떤 실익이 있는지도 명확하게 규정된 것이 없다”고 말했다. 사건 발생 지역의 언론인 경인일보 역시 익명 보도를 해왔다. 배상록 편집국장은 “언론 대부분이 다 이름을 쓰고 있으니 그냥 쓰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경찰에서 공식적으로 범인으로 확정한 게 아니고 용의자의 방어권도 제약된 상태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보도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고 전했다.
관련해 보다 명시적인 기준을 적용 중인 언론사도 있다. 한겨레는 내부적으로 ‘범죄 수사 및 재판 취재 보도 시행 세칙’을 제정해 운영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수사나 재판 과정에 있는 피의자(피고인, 혐의자)의 이름 등은 보도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한겨레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제주 전남편 살해 사건’의 피고인 역시 여전히 ‘고아무개씨’로 보도하고 있다.
한편 이씨의 자백을 기점으로 언론의 신상 보도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용의자를 줄곧 ‘A씨’로 보도해왔던 연합뉴스는 1일 저녁 이씨의 자백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실명과 사진을 공개했고, 역시 ‘이모씨’ 등으로 보도해온 국민일보, 서울신문, 중앙일보 등도 1일 온라인 기사부터 공개 보도를 시작했다. 경찰은 용의자가 자백하기 시작한 것은 맞다면서도 자백의 임의성과 신빙성, 객관성을 확인한 뒤 수사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김고은 기자 nowar@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