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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세상서… 제 아이들이 꿈을 갖고 살았으면"

故이용마 기자의 삶 돌아보니

최승영 기자  2019.08.28 14:5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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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마 MBC 기자의 시민사회장이 지난 23일 서울 상암 MBC 앞 광장에서 열렸다. 500여명의 기자, 언론계 관계자, 시민들이 자리해 고인을 기렸다. /언론노조 MBC본부

이용마 MBC 기자가 지난 21일 별세했다. 향년 50세. 기자의 소명을 누구보다 무겁게 받아들였던 언론인은 3년여 간 복막암 투병을 해왔다. 간병을 하던 그의 형과 누나가 마지막을 지켰다. 배우자와 초등 5학년 두 아이를 남겨둔 채였다. 이 기자는 눈을 감지 못하고 임종했다. 아이들은 처음 아빠가 떠났는지 몰랐다. 우리는 정권의 언론 장악에 맞섰던 해직기자이자 언론노동자,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부르짖은 개혁가를 잃었다. 아마도 사람들이 기억할 마지막 투사형 기자의 별세.


1969년 1월10일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이 기자는 전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987년 서울대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행정고시를 봐 공무원이 되려던 마음을 이후 고쳐먹는다. “(선배들은) 나와 고민의 차원이 달랐다…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나라가 잘되게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대단해 보였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가 더 중요한 거야.’ 당시 정치학과에서 유행했던 말”이라고 그는 책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에 적었다. ‘87학번’. 그러니까 ‘586세대’ 막내 세대에 속한 이 기자의 꿈은 이때 빚어졌다. 진로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MBC기자들은 2012년 1월30일 김재철 사장 퇴진을 목표로 한 ‘170일 파업’을 시작했다. 사진은 그 해 3월12일 서울 청운동 주민자치센터 앞에서 열린 ‘낙하산 김재철 투입 청와대 해명 촉구 기자회견’에서 당시 노조 홍보국장이던 고 이용마 MBC기자가 성명서를 낭독하는 모습. /뉴시스

정치학 석사와 군복무를 마친 이용마는 1996년 12월 MBC에 입사했다. 동문들이 교수, 변호사, 국정원 직원이 될 때 그는 기자의 길에서 소명을 찾았다. 그에게 기자 업은 “더 나은 사회여야 한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의 실천 방법이었다. 기자시절 그는 법조비리, 삼성 비판기사 등 타사 기자들이 꺼려하는 보도를 다수 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유효한, 굵직한 문제의식에 기반한 기사들이다. 2000년 경제부 금융팀에서 함께 일한 송형근 MBC 논설위원은 “방송기자 미덕은 빨리 내용을 파악해 구성하고 쓰는 건데 믿고 맡길 수 있는 후배였다. MBC ‘이용(하지)마’라는 이름 때문에 출입처에서 잘 기억했다. 기자실에선 까칠했다. (공무원이든, 선배든) 무식하면 잘 못 참았다. 대놓고 얘기를 하니까 껄끄러워 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보도국 간부들 입장에선 거침 없는 내부 비판이 달가울 리만은 없었다. 그는 노무현 정부 당시 삼성 비판기사가 뉴스데스크에서 쉽게 빠지자 보도국 게시판에 ‘삼성공화국’이란 글을 수차례 올렸다. 2004년 9월엔 MBC 기자회보 편집장을 맡아 내부에서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사회부, 경제부, 문화부, 통일외교부, 정치부, 시사매거진 2580, 국제부, 편집부 등 여러 부서를 “쫓겨나” 듯 옮겨 다닌 배경이다. 2008년 서울시청을 함께 출입한 조효정 MBC 기자는 “항상 당당했고 자신감 넘치는 투사 같았던 선배다. 기사엔 양보 없지만 사석에선 잘 웃고 소탈했다. 권위를 내세우는 타입이 아니었다”고 전했다.


2014년 5월27일 업무방해 혐의로 기소된 언론노조 MBC본부 집행부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해직기간 회사와의 법적분쟁은 수년간 지속됐다. (왼쪽부터 당시 직함으로)정영하 전 위원장, 이용마 전 홍보국장, 신인수 변호사, 강지웅 전 사무처장, 김민식 전 편성제작부위원장, 장재훈 전 정책교섭국장.

고인이 2011년 2월 노조 집행부에 들어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전임 노조위원장이 해고됐고, “이긴다는 보장 없이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해고를 염두에 둘 수밖에 없던 조건.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내가 안하면 후배가 해야 돼서”라고 말하는 이들이 노조에 모였다. 홍보국장을 맡은 이 기자는 “다시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겠습니다”는 파업 슬로건을 내놨고, “공정성 보장요구는 근로조건”이란 법원 판결을 받는 등 지략가이자 행동가로서 활동했다. 김재철 당시 사장의 법인카드 사용내역을 폭로하며 경영진의 타깃이 된 그는 언론 역사상 가장 길었던 MBC ‘170일 파업’ 주도 혐의로 2012년 3월 해고됐다. 복직까진 5년9개월이 걸렸다.


2017년 3월11일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석한 이 기자는 검찰총장과 공영언론사 사장 인사권을 국민에게 돌려주자고 발언했다. 복막암 투병 중에도 이 기자는 공영방송사 지배구조 개선 등 필요성을 설파하는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투병 중 문재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도 이를 강조했다. /언론노조 MBC본부

해직 기간인 2016년 8월 말 이 기자는 복막 중피종이란 희귀암 말기 판정을 받는다. 그간 마음에 쌓인 화와 스트레스가 원인일 것이란 원망과 안타까움의 말이 언론계를 돌았다. 투병 중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이 기자는 온전히 자신과 가족을 위한 취재를 했다. 의학기사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암을 공부했고, 죽음을 준비했다. 원불교 신자인 그는 암 발견 초 자연치료법을 택하며 경기 남양주와 전북 진안, 경남 거제 등에서 몸 관리를 했다. 면역항암 치료로 호전되는 듯했던 병세가 악화됐고 지난 6월 말 입원했다. 당초 의사가 선고한 12~16개월의 남은 수명보다 두 배를 더 살아냈다.


이 기자는 2012년 3월20일 해고돼 2017년 12월8일이 돼서야 복직할 수 있었다. 해직기자들은 그로부터 3일 뒤 600여명의 MBC 구성원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출근했다. 5년9개월만에 복직한 이 기자도 휠체어를 타고 함께 했다.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것 같다”는 소감을 밝힌 이날은 이 기자의 마지막 출근이 됐다. /뉴시스

함께 해직 기간을 보내고 물심양면 투병을 도운 정영하 MBC 대외정책부장(전 노조위원장)은 “지웅이 형(강지웅 MBC 시사교양1부장)이랑 용마랑 셋이 몸 상태나 치료 얘길 많이 했다. 그렇게 하면 희망적이니까. 애들 때문에 쉽게 포기 못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성년이 되는 스무살까지만 버텼으면 좋겠다’, ‘아빠 생각을 담은 책을 그때 애들한테 보여준다’가 소원이었다”고 전했다.


이 기자는 2017년 12월1일 제5회 리영희상 수상자로 선정돼 배우자, 두 아들과 함께 시상식장을 찾았다. 암 투병 중이던 “어린 아이들 현재, 경재를 위해서. 아빠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참석했다고 밝히며,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사회, 아름다운 사회가 되기를 다시 한 번 꿈꿔본다”고 했다.

아픈 와중에도 그는 촛불집회 등을 찾아 국민이 뽑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필요성을 강조했다. 제5회 리영희상 수상 소감으론 “저는 제 아이들이 꿈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우리가 해야될 과제로 남아있는 것…정의가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사회를 꿈꿔본다”고 한 적이 있다. 가장 사적인 바람은 가장 공적인 문제와 어떻게 맞닿는가. 다음 세대에게 더 나은 세상을 물려줄 기성 세대의 의무로서다. 그들의 존재는 어찌됐건 기성 세대가 이제껏 살아온 세계에 내린 긍정 평가를 담보한다. 우리는 그 결과를 설득할 책임이 있다. “세상은 바꿀 수 있습니다”라는 이 기자의 대책 없는 낙관과 치열한 태도는 그렇게 남은 자의 몫이 됐다.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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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는 기록으로 남아 적당한 타협 어려워... 따뜻한 뉴스, 더 많이"

이용마 기자가 남긴 말들


“다른 것도 아니고 기사잖아. 내 이름으로 나가는 기사다. 기사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나에게 있다. 적당히 타협하기는 어렵다. 기록으로 남는 거니까.”
-고 이용마 기자가 지난 2014년 11월7일자 기자협회보와 인터뷰에서 한 발언. 보도국 안에서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이 기자가 ‘기록’에 얼마만큼의 가치를 두는지 알 수 있다. 그 결과 이 기자는 자의와 무관하게 여러 부서를 옮겨 다녔다. 인터뷰 당시 그는 해직 1000일을 앞둔 터였다. 해직기자를 복직시키라는 법원 1심 판결 후에도 MBC는 이를 사실상 거부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마저 잃은 경영진을 비판, “기자나 언론인들은 모두 양심을 먹고 산다”, “또 그 상황에 부닥치면 파업을 선택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기득권을 가진) 소수에 대한 감시도 좋지만, 다수를 배려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반영해서 억울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는 사회...다시 복직을 한다면 나는 그 부분에 좀 더 힘을 써서 따뜻한 뉴스를 많이 만들고 싶다.”
-이용마 기자는 해직 5년9개월만인 2017년 12월 복직 후 첫 출근을 한 자리에서 이 같이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바람이자 MBC 구성원에게 남긴 당부의 말이었다. 이 기자는 후배가 전달해 준 MBC 사원증을 목에 걸며 “깨고 싶지 않은 꿈을 꾸는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날 출근은 그의 마지막 출근이 됐다. 남은 이들이 짊어진 무거운 과제가 된 말이기도 하다.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데 검찰총장과 공영방송 사장을 왜 국민이 못 뽑나…아래로부터 권력기관을 철저히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게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아갈 길”
-이 기자는 2017년 3월11일 서울 광화문 촛불 집회에서 검찰총장과 공영방송 사장의 인사권을 국민에게 돌려줘 바로 세우면 모든 사회 적폐를 해결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며 이 같이 말했다. 해직 기간 복막암 말기 진단을 받고 투병을 하면서도 그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필요성을 강조하고 방법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6년 말, 2019년 초 두 차례 이 기자를 문병했고, 이 기자는 그때마다 언론개혁에 대한 의견을 전했다.


최승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