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의 초여름, 상하이의 젊은이들과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이 신티엔디(新天地) 거리 일대를 분주하게 오갔다. 바로 이 맞은 편 골목에 상하이 시절 마지막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다. 유럽 정취가 느껴져 인기가 많은 관광지와 임정 청사가 지척에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일대는 과거 정치적 망명자에게 관대했던 프랑스 조계지였으니 말이다.
상하이(上海)에서 시작해 항저우, 전장, 창사 등을 거쳐 충칭에서 끝나는 임정의 고된 여정.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이 길의 일부를 톺아봤다. 기자협회 중국단기연수에 참가해 중국을 배우는 동시에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가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상하이 임정 청사를 가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교과서에 나온 단편적 지식을 바탕으로 의무감에 한 번 둘러본 것 뿐, 그 이상의 이해는 없었다. 이번 연수에서는 임정 수립부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 일제의 체포를 피하기 위한 김구 선생의 피난, 상하이를 떠나 장정시기에 접어든 임정의 여정을 하나의 대하드라마처럼 마주할 수 있었다.
가장 신선하게 다가온 곳은 저장성 자싱(嘉與)에 위치한 김구 선생 피난처였다. 옛 거리를 그대로 재연한 메이완지에 76호. 항저우와 자싱이 있는 저장성 일대는 물의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곳곳이 수로로 연결돼 있다. 이 곳 역시 호수와 맞닿은 주택인데, 수로를 통해 항저우 등 가까운 지역은 물론 멀게는 베이징까지 갈 수 있어 피난처로는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 김구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상처한 선생은 자싱 피난처에서 뱃사공 주아이바오(朱愛寶)와 함께 피신 생활을 했다. 5년간 사실상 부부처럼 지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 주아이바오가 부지런히 노를 저어 호수로 나갔다가 안전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반복했다. 주씨는 선생이 임정 요인이라는 걸 모르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고 한다. 후일 선생은 백범일지에 주씨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을 표현하기도 했다.
연수에서는 상하이 지역 언론사인 ‘신민만보’를 방문할 기회도 있었다. 사실을 고하자면 공산당이 곧 법이자 진리인 중국 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면 얼마나 중요할까’ 얕잡아 보는 마음이 있었다. 중국 언론에서 과연 배울 게 있겠느냐는 다소 거만한 판단도 했다. 그러나 중국 매체는 뉴미디어에 대응하는 속도나 질, 양에 있어서만큼은 한국 기자들의 예상을 한층 뛰어넘었다. 변화하는 언론 환경과 독자들의 기대를 위해 다양한 신매체를 설립하는가 하면, 이를 끌고 나갈 인재들을 투입하는데도 거침이 없었다. 물론 이 같은 투자가 가능한 이유는 중국의 언론환경이 누구든 언론사를 세울 수 있는 한국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긴 하지만 말이다.

우리보다 먼저 ‘현금 없는 사회’에 진입하고 있는 중국의 생활상을 경험하는 것은 가장 흥미로운 일이었다. 알리페이나 위챗페이를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현금을 쥔 내 손이 마치 애물단지로 느껴질 정도였다. “현금이요? 잔돈이 있을지 모르겠네요”라는 말을 한 두번 들은 게 아니어서다. 중국에서는 거지도 QR코드로 동냥한다는 농담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 국내연수 과정에서 기자협회로부터 ‘중국전문기자과정’이라고 쓰인 이름표를 받았다. 중어중문을 전공했지만 10여년 전 졸업하고 그저 먼 발치에서나 중국을 바라보던 터였다. 2000년대 중반 어학연수로 1년간 머물렀던 상하이와 베이징, 지금은 과연 같은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져 있었다. 이번 연수는 중국을 향한 그때의 애정과 열정을 되살리는 계기가 됐다. 중국전문기자로의 꿈을 키워나갈 시작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