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기획, 편집국장 반대로 무산되자 집단반발
“경영진의 기조가 편집국에 스며들고 있음은 분명하다. 편집국이 현재 월급이 주는 안온함에 안주한 사이 미래는 어두워져만 가고 있다. 연차가 낮은 기자들이 단결해 연명하는 이번 방의 의미는 향후 사내 주요 결정에서 미래를 위한 목소리를 내고 연대를 통해 목표를 관철하겠다는 선언이다.”
지난 11일 경향신문 8년차 이하 기자들의 성명은 언론계가 처한 현실을 보여주는 동시에 기자사회에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저널리즘보다 경영논리가 앞서고 소통·토론이 원활하지 않은 뉴스룸은 경향신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종합일간지 8년차 A 기자는 “어느 언론사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라며 “수익을 내야한다는 회사의 논리를 무시할 순 없지만 언론사가 돈벌이만 하는 곳은 아니지 않나. 언론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타사 기자들도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드는 성명”이라고 말했다.
이번 성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들이 5개월간 취재·분석한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기획 보도가 편집국장의 반대로 무산된 사건이다. 기자들은 국장이 정부나 대기업과의 관계를 신경 쓰느라 기사를 ‘킬’했다고 봤다. 후배들에 이어 지난 18일 성명을 발표한 경향신문 10~18년차 기자 48명은 “국장은 ‘외압은 없었다’고 했다. 구체적 외압이 있기도 전에 우려만으로 국장이 먼저 기사검열을 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절망케 한다”고 밝혔다.
언제부턴가 뉴스룸마저도 저널리즘보다 경영논리 앞세우기 시작
사실상 광고·협찬이 언론사의 존폐를 좌지우지하는 현실에서, 광고주에 목매는 기자들의 모습은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경제지 산업부에 속한 주니어 B 기자는 “기사 주제를 정하는 과정에서 광고 유무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며 “데스크는 ‘여기 도움(광고)되는 곳이냐’는 말을 일상적으로 한다. 광고 많이 하는 기업이니까 너무 세게 조지지 말라는 지시도 여러 번 들었다”고 전했다.
지역일간지 C 기자도 “지역의 최대 광고줄인 지자체를 비판하려면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며 “요즘 기자 상당수가 성명을 낸 경향신문 기자들과 비슷한 감정을 느껴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기자들은 내부에서 목소리를 내는 데는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자유롭게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데다 의견을 내더라도 실제 반영되기 어렵고, 행여 인사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두렵다는 등의 이유였다.
B 기자는 “이의제기해봤자 회사가 변하지 않을 걸 아니까 다들 잠자코 있는 것”이라며 “윗선에 밉보인 선배들이 승진에서 밀리거나 한직부서로 발령 난 사례를 보면 나서기가 더 부담스럽다”고 했다. 또 다른 경제지의 D 기자도 “부당한 일을 겪고 성명을 낼까하는 생각을 해본 적은 있지만 우리 회사에 그런 전례가 많지 않아 그만뒀다”며 “기자 스스로 ‘내 기사가 왜 안 나가냐’고 어필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처럼 상명하복이 체화된 상태에선 어렵다”고 진단했다. 방송사에서 일하는 E 기자는 “옛날 선배들이 ‘우리 때는 부장이고 국장이고 다 들이받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다”면서 “주니어 기자들이 먼저 총대를 메기 쉽지 않고 중간연차 기자들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목소리 못 내는 분위기… “언론사가 갈 방향 논의할 계기 됐으면”
언론계 전반적으로 이런 무기력감이 퍼져 있는 상황에서 경향신문 젊은 기자들이 경영진과 편집국장을 향해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 자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다. 이번 사례처럼 기자들이 내부 문제를 성명을 통해 공론화하는 일은 전체 언론사를 통틀어 1년에 한두 차례뿐이다.
경제일간지 저연차 F 기자는 “기업을 비판한 기사가 나도 모르게 삭제되거나 데스크 마음대로 기사의 ‘야마’를 바꾸는 것에 어느 순간 무덤덤해졌다. 벌써 비즈니스 마인드에 닳고 닳았는데 비슷한 연차인 경향신문 기자들이 낸 성명을 보고 놀랐다”며 “주니어들이 의견을 모아 자사 윗선을 비판하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편집국장 출신인 한 종합일간지 간부는 이번 성명이 내부 갈등을 드러내는 데 그치지 않고 언론사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논의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젊은 후배들이 언론에 대한 정도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낸 것을 높이 살만하다”며 “다만 편집국장으로선 편집권과 경영권 사이에서 현실적인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후배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면서 절충안을 찾는 것도 편집국장의 역할인 것 같다”고 말했다.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