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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언론통제에 '소문'으로 저항… 3·1운동 후 지하신문 쏟아져

[특별기고/3·1운동과 한국 언론] 윤상길 신한대 미디어언론학과 부교수

윤상길 신한대 부교수  2019.02.27 11: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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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길 신한대 미디어언론학과 부교수. 일본 제국주의 통치하에 놓여 있던 100년 전 3월1일 한반도에는 전국적인 규모의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식민지 통치 질서에 대한 저항으로 여겨 조선총독부가 사용했던 의미에서의 ‘소요(騷擾)’는 아니었다. 식민지 현실을 극복하고자 이 땅의 민중들이 외쳤던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의 ‘아우성’이자, 재갈 물려진 민중들의 커뮤니케이션 욕구가 집약적으로 분출되었던 ‘광장의 야단법석’이었다.


1910년 8월29일 강제로 병합 조약을 체결해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일본은 먼저 식민지를 통치할 수 있는 기구를 정비, 신설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철저한 식민지 수탈을 위해 그리고 한국 민중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일본은 억압 일변도의 이른바 무단 통치를 펼쳐 나갔다. 한국 민중의 이익을 대변할 언론의 가능성을 봉쇄하여 언로(言路)를 독점할 필요성에서 언론을 통제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조선총독부는 우선 한국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문들은 전부 폐간시켰다. 일본인이 발행하는, 식민 정책에 비판적인 신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독립 정신이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서적들은 모두 발매를 금지하거나 압수했다. 더 나아가 총독부는 통감부 치하에서 항일 언론의 선봉에 섰던 <대한매일신보>를 인수해 지령을 이어 받고 제호를 <매일신보>로 바꾸어 한글로 발행했다. 또 <경성일보>를 일본어 기관지로, <서울프레스>를 영어 기관지로 삼았다. 이를 통해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 정책을 선전하고 제국주의적 이익을 대내외적으로 대변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 내에서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신문들도 조선어판을 발행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인들의 커뮤니케이션 욕구를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비롯해 일본인들이 발행하던 신문을 통해 해소시키려 시도했다.



주목할 사실은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술이 생각보다 훨씬 더 교묘했다는 점이다. 우선 한문의 문화적 위치를 재조정하는 작업을 통해 유림 세력을 포섭하려고 했다. 1910년대의 (문자)언어상황은 한글과 일본어라는 두 개 항을 넘어 보다 복잡했다. <서유견문>과 <독립신문> 이래의 어문 혁신에도 불구하고 한문의 문화적 위치에 대한 재조정 작업이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매일신보>는 한문의 문화적 가치를 재조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초부터 한국인들을 지도하고 대표할 집단으로 ‘조선귀족’과 중앙 및 지방의 유림을 지목하고 이들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담론적 지원을 했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정책방향에 따라 <매일신보>는 제1, 2면에 한학 지식인의 만필(漫筆)이나 한시를 위한 난을 상설화하고 현상문예를 통해 한시를 공모하는가 하면, 유학과 한문학 관련 행사가 있을 때마다 홍보자의 역할을 자임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는 1912년 지면개편을 통해, 사회면에 해당하는 <매일신보> 3면 전체에 한국인의 일상생활 영역 안에서 일어나는 각종 사건사고를 보도하는 기사를 집중 배치함으로써 한국인 독자들이 자신들의 ‘사회’를 ‘치안’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즉, 무질서한 도덕적 타락을 일소하는 데 식민권력이 기여했음을 보여줌으로써 통치정당성을 부여받고자 한 것이었다.


1910년 8월29일 강제로 병합 조약을 체결해 한국을 식민지화했던 일본은 한국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신문들을 전부 폐간시켰다. 대신 경성일보<사진> 등 기관지를 통해 식민 정책을 선전했다. /독립기념관

그러나 이와 같은 일제의 의도적인 의식조작이 모든 한국인들의 의식까지 뒤흔든 것은 아니었다. 정보관리체제 중의 하나인 신문과 같은 매스미디어가 주위 환경변화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민중들에게 전달해주지 못하여, 이를테면 민중들이 정보의 빈곤상태 혹은 ‘정보에 대한 굶주림상태’에 놓여 있을 때, 혹은 “주위환경에 대해서 충분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에는, ‘소문’이라고 하는 대안미디어가 재등장하기 때문이다. 특히 ‘여론형성의 사회영역’이라 할 수 있는 공론장이 식민지배에 의해 굴절·왜곡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유언비어와 같은 소문은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서 매우 중요한 현상이다. 즉, 식민지배자가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허위적 정보로 이루어진 선전메시지를 지배적 공론장을 통해 유포시키는 한편, 피식민지인들의 커뮤니케이션적 욕구를 해소해 줄 매스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식민지배자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는 경우라면, 이 때의 소문은 사회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피식민지인들의 식민지배 상황에 대한 집합적 해석의 노력으로서 이들의 저항적 의지의 발로이자 억압된 커뮤니케이션 욕구가 분출된 ‘저항적 공론장’(counter publics)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3·1운동을 계기로 의사 표현의 요구가 폭발하며 조선독립신문<사진> 등 지하신문이 쏟아져 나왔고 이 흐름은 192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독립기념관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신뢰할 만한 민간 언론이 사라진 1910년대 상황에서 소문은 유사-언론이자 유사-네트워크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다. 소문에 지배세력에 대한 도전과 불만이 담겨져 있다고 인식했던 조선총독부는 자신의 식민정책을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선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항간의 소문에 대해 반박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항간의 풍문이 조선인민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책임 또한 조선인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식민화 초기 <매일신보>가 한국인 토착사회 내에서 널리 유포되고 있던 소문을 반박하는 형태의 선전 전략을 채택했던 사실은 한국인의 언로(言路)로서 기능하고 있던 소문의 유사-언론적 역할을 경계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욕구는 본능적이다. 외부적 강제에 의해 탄압하고 억압한다고 해서 없어질 성격이 결코 아니다. 억압에 직면하면 일단 위축되기는 하지만 다른 어떤 형태로라도 맥을 이어가게 마련인 것이 커뮤니케이션 욕구의 본질이다. 언론 활동은 바로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욕구에 기초해 이루어진다. 이런 점에서, 한국 민중의 독립 의지와 역량을 집약적으로 표출한 ‘광장의 아우성’인 3·1운동은 소문의 유사-네트워크로서 역할이 확장된 결과물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언론 활동이었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3·1운동은 한국인의 언론활동을 좀 더 조직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3·1운동을 계기로 그간 억눌렸던 의사 표현의 욕구가 폭발하며 다양한 매체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런 매체들은 같은 제호로 연속 발행하며 어느 정도 신문 체제를 갖추었던 ‘지하신문’과 단순히 일회성으로 배포된 선언문, 격문, 경고문 등의 ‘전단’으로 나눌 수 있다. 지하신문이 만세 시위 상황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면, 전단은 독립 의지를 밝히거나 만세 시위를 촉구하는 내용을 주로 담았다. 특히 항일지하신문은 3·1운동에 대해 허위·왜곡보도를 일삼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맞서는 ‘대항 매체’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국내에 등장했던 지하신문의 대표적인 예로는 <조선독립신문>이 있었고, 그 외에도 <국민회보>, <진민보>, <충북자유보>, <대동보>, <반도의 목탁>, <대동신보>, <자유민보>, <국민신보>, <혁신공보>, <자유신종보> 등이 있었다. 대부분 청년, 학생들이 옥고를 치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발행했던 항일지하신문들이었고, 이 신문들은 독립운동을 확산시키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동아일보 창간호. 이러한 흐름에서 보면, 1920년 한국인이 발행한 민간신문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의 창간을 가져온 가장 큰 원동력은 강제병합 직후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한국인의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의 ‘아우성’이었다. 그리고 광복 직후 다양한 정론지의 등장을 가져온 ‘민주주의의 아우성’, 이후 군사정권이 차단한 언로를 재차 열었던 1987년 민주화의 ‘아우성’, 2017년 촛불혁명의 ‘아우성’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계기는 항상 한국인들이 벌였던 민주주의의 ‘아우성’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1919년 3월1일에 있었던 독립을 향한 민주주의의 ‘소란’은 한국 언론이 자신의 역할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때마다 되뇌어야 할 원형적 경험이라 할 것이다.  


윤상길 신한대 미디어언론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