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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월드컵에 묻힌 것

심석태 SBS기자  2002.07.1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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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석태 SBS 디지털뉴스부 기자



전국이 월드컵 열기 속에 빠져버렸던 지난달 중순,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때였다. 막 밥을 먹으려는데 휴대전화가 울렸다. 조금은 불쾌한 생각에 전화를 받았지만 나는 결국 식사중이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전화를 건 이는 대학 시절 문학회를 함께 했던 여자 후배였다. 전화기에서 흘러나온 말은 월드컵 코리아의 얘기가 아닌 듯 했다. “저, 지금 단식농성 중인데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너무 힘드네요.”

한 반도체 업체에서 해고된 뒤 동료들과 함께 힘겨운 싸움을 해오고 있는 그였다. 사회의 관심을 끌기 위해 ‘노사정위 단식농성’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음에도 기자 구경조차 어렵다는 것이다. “분신이라도 하면 관심을 끌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말이 가슴을 찔렀다. “언제 시간이 되면 밥이나 먹자”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봉쇄당한 채 “워낙 월드컵 열기가 거세서…”라며 대화를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여중생 2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사고도 그랬다. 포르투갈과의 일전을 앞두고 터진 이 사건도 처음엔 별로 언론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일부 방송과 신문이 이 내용을 다루긴 했지만 금방 ‘대∼한민국’의 함성에 파묻히고 말았다. 사이버 공간에는 미군측의 어처구니없는 태도에 대한 비난이 잇달았지만 이른바 제도권 언론이 본격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월드컵이 끝난 뒤였다. 이들에 비하면 반짝 특수라도 누린 지방선거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하지만 월드컵에 묻혀버린 일들이 어디 이들 뿐일까.

월드컵은 분명 즐거운 축제였다. 기자협회 축구대회 때마다 곳곳에 흉터까지 생길 정도로 축구를 좋아하는 나는 수백만의 인파가 거리 응원에 나서는 모습에 감동하고 또 감동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거리에서, 집에서 월드컵을 즐긴 사람들만의 나라가 아니다. 4700만 명이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 마땅히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그러나 우리 언론은 너무 손쉽게 ‘월드컵 열기’라는 핑계 뒤로 숨어버렸다. 시청자와 독자들이 모두 월드컵 얘기만 좋아한다는 것이 과연 언론이 사회에 대한 적절한 관심을 방기해도 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는 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누구를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무도 미처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월드컵 열기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합당했는지 지금 따지고 비판하는 것은그리 유쾌한 일도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다양성과 소수의 얘기를 너무나 쉽게 외면해버리는 현실이 안타까운 것이다. 우리를 이긴 터키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내는 성숙함을 경기장 밖에서도 기대하기는 너무 이른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