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섭 전 기자협회 편집국 부장 2018.08.17 15:31:41

뼛속까지 기자협회 사람이고 싶었다. 이력서에 기자협회 입사, 퇴사(정년) 딱 두 줄만 적고 싶었다. 첫 직장 한국기자협회가 이익집단, 친목모임, 권익단체이기만 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언론민주화, 언론개혁, 편집권 독립을 성취하고자 도전하는 열혈 기자들이 집결한 곳이라 만족했고, 힘들어도 뿌듯했고 행복했다. 기자협회 강령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여하한 압제에도 뭉쳐 싸운다’는 조항이 좋았다.
혈기왕성하던 한때, 강령에서 ‘권익옹호’ 구절을 통째로 빼자고 우겼다. 세습권력이 된 언론의 환부, 갑질하는 언론인의 치부를 들추면 그 언론사 소속이거나 당사자와 말싸움하는 짓에 지쳐서 투덜거린 볼멘소리였다.
“내가 낸 회비로 월급 주는데 감히 나를 조져”, “협회라면 회원과 회원사 권익을 옹호해야지” “너희가 언론계 안기부냐”,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테니 법정에서 보자” 등. 비난, 협박, 제소 위협이 전화기에 댄 귀를 사정없이 때렸다.
1996년 대통령 비서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김영삼 대통령의 언론기피증을 지적한 내 칼럼이 실린 날이었다. 대통령에게 칼럼복사본을 읽어보시라 집무실로 올렸다면서 덧붙인 말이 고약했다. “그런데 기자협회보는 참 특이합니다. 온갖 협회가 내는 숱한 간행물을 보아왔지만 회원과 회원사 잘못을 지적하는 쓴소리 가득한 기관지는 처음 봅니다. 이러면 기자협회 운영이 힘들지 않나요?”
밖에서 보기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을 터이다. 그러나 ‘정론을 지키는 방패이자 곡필을 찌르는 창’이고자 했기에 자기비판, 자율규제, 자정(自淨)혁명은 숙명이었다. 1989년부터 2000년까지 10년간 구슬땀 흘리며 보람차게 일했다. 그러나 뼈를 묻지는 못했다.
미련이 남아선가? 몇 장면이 떠오른다. 수습기자로 갓 출근해 편집회의에서 김주언 선배를 만났다. 5공화국 권부가 하루도 빠짐없이 은밀하게 시달한 보도통제 가이드라인 ‘보도지침’은 1986년 용기 있는 언론인들에 의해 폭로됐다. 보도지침 전문을 수록한 월간지 <말> 특별호를 대학 강의실마다 뿌리고 다녔다. 투옥을 각오하고 권력에 맞선 일선기자가 누굴까 궁금했는데, 그 주인공을 만난 것이다. 꿈이 아니라 생시였다. 한동안 친구들에게 ‘역사적 만남’을 자랑하고 다녔다.
한국기자를 대표할 만한 그는 협회장이 돼 1992년 ‘언론계 YS장학생 폭로’를 비롯한 여러 특종으로 기자협회보 명성을 더욱 높였다. 친구 같은 후배 장현철 기자와 나는 그를 ‘죠스 회장’이라 부르며 따랐다. 보도지침 재판은 9년 3개월이나 걸려서 대법원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 언론사에 기록될 무죄판결을 주간지 기자협회보가 1995년 12월 단독 보도했으니 자부심을 감추기 어렵다.
동아일보 손석춘 선배의 ‘기고’를 잊을 수 없다. 1991년 동아일보 김중배 편집국장 경질로 실체가 드러난 ‘자본의 언론통제 사태’를 고발한 용감한 글이었다. ‘한칼에 꺾인 편집국의 꽃, 숨은 권력과 편집국 민주주의’ 제목을 뽑아 편집했다. 사표 던질 각오로 꾹꾹 눌러쓴, 정의로운 분노였다.
“사주가 편집국장을 날렸는데, 나 살려고 이 글 발표 못하면 내가 과연 기자 맞나요?” 후배에게도 존칭하는 그와 둘이서 소주를 들이켜다 듣는 자책에 가슴이 아팠다. 이튿날 동료들 만류를 무릅쓰고 기자협회보에 내겠다며 원고를 들고 왔다. 결단하기까지 고뇌를 짐작할 수 있을까.

1994년엔 북한 조선기자동맹에 ‘남북 기자교류 제의 성명’과 두꺼운 ‘기자협회보 축쇄판’을 인편에 전달했다. 강원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이면서 기자협회 남북기자교류 특별위원회 위원인 송광호 기자가 고려민항을 타고 평양을 방문했다. 캐나다 시민권을 가졌고, 세 차례 방북 취재한 경험을 감안했다. 국가보안법 서슬이 퍼렇던 당시 통일원에 북한주민 접촉신청서 승인을 받기까지 곡절을 겪었다. 훗날 남북 보도·제작 준칙 제정, 남북기자단체 평양회담과 금강산 통일토론회 개최, 남북 기사교류 합의서 채택이라는 성과를 올리는 데 밀알 한 톨쯤 됐으리라.
빠트릴 수 없는 것은, 기자협회보 특보(特報)다. 1992년 MBC 파업을 다룬 특보도 기억나지만, 1997년 1월 두 차례 낸 ‘언론총파업 특집호’는 정말 대단했다. 남영진 회장, 안영배 편집국장이 주도해서 제작한 특보는 첫 번째는 4면으로, 두 번째는 8면으로 냈다. 방송법 개악을 반대해온 방송4사 노조의 ‘노동법 날치기 통과 반대’ 파업과 이에 동조하는 신문·통신사 노조의 연대파업을 국민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종로2가 탑골공원에 모인 2000명의 집회장면을 1면 머리에 통단 사진으로 편집해 부각했고, 펜과 마이크를 접고 파업에 뛰어든 기자, PD들의 결연한 목소리를 전했다. 신문과 방송이 다루지 않는 언론총파업 진행상황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특보 수 만부가 거리행진 때마다 파업언론인들의 손을 거쳐 전국 방방곡곡에 뿌려졌다.
한때 기자협회에 노조가 있었다. 1991년 편집국·사무국 직원들이 결성했다. 조합원 5명으로 출발한 단출한 노조였다. 규약에 ‘모든 사안은 총회에서 결정한다’를 명시할 만큼 100% 직접민주주의로 운영했다. 노조 결성 전까지 석탑출판사의 <노동법해설>을 교재로 일요일 아침 신촌 독수리 다방에 모여 80년대 대학가에서 그랬듯 비밀리에 ‘의식화’ 공부를 했다. 해고당한 사무국 동료의 복직을 노사대화 끝에 이뤄내고는 활동이 미미했다. 노조 출범부터 해산까지 위원장을 맡았다. 이곳에 뼈를 묻으려면 장(長)을 맡는 일도 운명이려니 하며 받아들였다.
기자협회보를 만들며 꼿꼿한 분들을 많이 만났다. 딸깍발이 선배언론인들, 명민하고 강단 있는 기자들, 협회를 거쳐 간 친형제 같은 동료들.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 같이 ‘영혼이 맑은 저널리스트’였다. 감히 내 삶이 아직 탁하지 않다면, 이분들에게서 보고배운 덕분이다.
1980년 신군부의 폭압에 맞서 계엄철폐, 검열반대를 주도하다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기술자 이근안에게 당한 끔찍한 고초를 이겨낸 인동초(忍冬草), 노향기 회장의 맑은 영혼을 30년째 접하며 새삼 거인의 어깨에 무임승차했던 지난 10년을 회고한다. 모두 강건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