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선 전 기자협회 편집실장 2018.08.17 14:53:20

내가 기자협회 편집실장을 맡은 것은 1977년 12월이었다. 햇수로 따지면 40년 전이니까 아득히 먼 엣날 일이다. 당시 기자협회 회장은 한국일보 정치부 박실 기자였다. 박회장은 나의 경력인 서울대 대학신문 편집장 5년과 신춘문예 등단 작가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여 나의 이력서를 보자마자 곧바로 채용을 결정했다. 그런데 그 결정은 나에게는 매우 운명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전업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으므로 기자협회에서 5년 정도 일한 뒤 그만두고 소설 쓰는 일에 정진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의 그 꿈은 전두환 등장으로 투옥되면서 산산이 깨졌고, 일반인은 상상할 수도 없는 고초를 겪었다.
그러면 70년대의 언론 상황과 기자협회보는 어떤 성격의 매체였는지부터 살펴보자.
박정희는 1972년 10월에 유신을 선포하여 영구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종신집권 기도는 대학생, 종교계, 야당 등의 거센 저항을 받아 시국은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 때 박정희가 빼어든 칼이 대통령 긴급조치였다. 그리고 그 긴급조치 중에서 가장 악랄한 것이 ‘막걸리 긴급조치’라고 풍자되었던 긴급조치 9호였다. 1975년 5월13일에 선포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대해 일체의 비방, 반대, 왜곡을 금하고 개헌 청원이나 폐기를 주장하거나 찬동, 선동을 주장을 할 수 없고, 이런 내용을 방송 보도하는 행위도 금지했는데, 긴급조치 위반자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할 수 있으며 위반자는 1년 이상 징역에 자격정지 10년 이하의 형을 받도록 했다. 이 긴급조치 9호로 세상은 얼어붙었고, 감옥으로 가는 긴 행진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긴급조치에 대해 부정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도 긴급조치 위반이었으므로 술 마시다가 붙잡혀가는 시민들이 많았기 때문에 긴급조치 9호는 ‘막걸리 긴급조치’라고 풍자되었다.
긴급조치 9호 발동으로 언론은 그야말로 암흑기를 맞이했다. 정부 비판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한 시대에 기자협회보는 그래도 ‘신문 중의 신문’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었다. 모든 언론이 납작 엎드려 있어도 기자협회보만은 고개를 쳐들고 한마디씩 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당시는 엄연히 군사독재시대였으므로 국방부 출입기자는 보안 벽에 막혀 취재도 어렵고 취재해도 쓸 수 없었다. 기자협회보는 1978년 초에 국방부 출입기자들의 고충을 털어 놓은 좌담 기사를 만들어 ‘알고도 못 쓰고 몰라서도 못 쓰고’라는 제목을 달아 국방 당국에 항의했다. 그리고 1979년 7월에 나온 기자협회보의 시론 ‘言論 自由를 다시 論함’은 그 제목 자체만으로 언론계에서 회자되었던 글이었는데, 그 시론은 당시 제도권 매체에서 최초로 나온 ‘언론 자유 요구’ 외침이었다.

10·26으로 박정희 시대가 끝나자마자 비상계엄령이 언론을 옥죄기 시작했다. 계엄사령부의 검열에 통과한 기사만이 인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시청에 검열단 사무실이 설치되었고 모든 언론사들은 그곳에 나와 있는 위관급 장교들이 허가한 기사만 보도할 수 있었다. 위관급 장교들은 상부에서 내린 지침에 의해 신문 대장에서 불가 기사를 찾아내 사인펜으로 X 표시를 했는데, 그 판정에 대해 기자들의 항의가 날이 갈수록 거세졌다.
해가 바뀌고 세칭 ‘서울의 봄’이 무르익어가자 각 언론사 기자총회에서 계엄 검열을 철폐하라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기자협회는 1980년 5월16일에 분회장·운영위원 연석회의를 열고 5월20일을 기해 계엄검열을 전면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 결의는 실행되지 못했다. 전두환 군부가 5월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면서 그날 밤에 기자협회 집행부를 전원 체포했기 때문이었다.
편집실에서는 실장인 나와 안양노 기자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나는 군사재판에서 기자협회 분회장 회의 결의문을 작성했다는 이유로 3년 징역 선고를 받았다. (김태홍 회장, 노향기 부회장, 박정삼 감사, 안양노 기자 등도 실형 선고를 받았다.)
전두환 군부가 5·17 쿠데타 때 기자협회도 타깃으로 삼은 것은 언론장악 음모의 서막이었다. 기자협회 간부들에게 실형을 선고했던 그해 8월부터 800명에 달하는 언론인 해직이 시작되었고, 연말에는 언론통폐합이 자행되었다.
나는 3년 선고를 받았지만 1년 만에 다른 기자들과 함께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기자협회에 복직했던 87년 8월까지는 신동아 등의 월간지에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면서 원고료로 생활비를 벌었다. 그 시기에 신동아에 ‘80년 해직언론인 현주소’ ‘언론통폐합 내막’ ‘5공 언론통제 구도’를 기고하여 5공 세력의 언론 장악 음모를 폭로했고, 그 기고문들은 1988년 5공 언론 청문회 때 주요 자료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해에는 정치권을 필두로 사회 전반에 ‘5공 청산’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그 시기에 기자협회보는 주간 발행을 단행했다. 타블로이드 4페이지로 발행했지만 언론계에서도 폭로거리가 워낙 많아 기자협회보는 매우 인기 있는 신문이 되었다. 작고하신 박권상 선생은 당시에 기자협회보를 “타블로이드 4페이지짜리 주간지가 일간지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평가했었다. 기자협회보는 언론계 5공 청산 작업의 선봉장 역할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