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모르게 컴퓨터에 ‘한국 16강 탈락’이란 기사제목을 썼다가 누가 볼까 서둘러 지웠다. 요즘 스포츠 기자들에게 ‘16강’이란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국민으로선 ‘더 없는 기쁨’이지만 직업인으로선 ‘끔찍한 악몽’이다.
스포츠 기자들의 달력에서 휴일은 사라진 지 오래다. 밤 12시, 집에 들어가면 만삭의 아내는 남편을 기다리다 잠들어 있다. 아침 6시 책상 앞에 앉아 라디오 출연 원고를 준비한다. 7시 라디오 뉴스는 전화 출연이다. 곧바로 8시 라디오 뉴스는 스튜디오 출연이다. 사무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하루 취재 일정을 점검한다.
오전에는 서둘러 한국-폴란드 전 수훈선수의 가정사와 성장 배경을 정리해서 저녁 뉴스용 기사를 미리 작성해 둔다. 내 담당은 송종국 선수다. 점심을 먹고 나면 포르투갈 팀의 훈련과 기자회견을 취재하기 위해 수원으로 떠난다. 인터뷰가 끝나면 차에서 기사를 쓰면서 회사로 돌아와 저녁 뉴스에 미국과 포르투갈 선수단 관련 리포트물을 내보낸다.
우리나라와 폴란드 전이 끝나면 밤 10시 30분, 이때부턴 11시 뉴스라인을 정신없이 준비해야 한다. 원고를 쓰고 오디오 녹음을 하고 화면 편집을 하고 방송 자막을 넘기는 작업이 이어진다. 한 발만 삐끗하면 방송사고다. 이때쯤 모든 기자들의 눈엔 핏발이 서리고 신경은 극도로 예민해져있다. 생방송이 끝나면 11시 30분이 넘는다. 다음 날 뉴스 아이디어 회의를 마치면 컴퓨터를 챙겨서 집으로 향한다.
우리 대표팀이 16강에 꼭 진출했으면 좋겠다. 나도 한국의 16강 진출, 한국의 승리에 내기 돈을 걸었다. 그러나 16강에 진출하는 순간 스포츠 기자들에겐 지금보다 더 한 진짜 악몽이 시작된다. “그 까짓 것 바쁘면 얼마나 바쁠까? 힘들어봐야 1년을 갈 것도 아닌데 기분 좋게 일하면 되지 뭐. 다 끝내고 기분 좋게 술 한 잔 마셔야지.” 마음을 다잡는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 자꾸 이런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16강에 올라가긴 가야 할텐데 정말 올라가면 어떻게 하지?” 그래서 나도 모르게 불충한 상상을 컴퓨터에 띄웠다 화들짝 놀라 지운다. ‘한국 16강 탈락’.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