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가 공영방송 KBS를 통제한 정황이 또 다시 드러났다. 2014년 세월호 참사 후 수석비서관 회의 등에서 KBS 사장선임과 이사장 선출 등을 논의하며 깊숙이 개입해 온 정황이 ‘김영한 비망록’을 통해 공개된 것.
전국언론노동조합(위원장 김환균)은 지난 17일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이 남긴 비망록 중 KBS와 관련된 18개의 대목을 공개했다. 김 전 수석이 김기춘 비서실장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 등에 참석하며 남긴 기록에는 2014년 6월16일~10월15일 기간 청와대가 KBS의 인사, 보도 등에 개입한 정황이 들어 있었다. 이 시기 KBS에서는 길환영 사장 해임과 조대현 신임 사장 선임, 이길영 KBS이사장 사퇴와 이인호 KBS 신임 이사장 선임 등이 이뤄졌다. 해당 자료는 비망록을 입수한 TV조선이 KBS 관련 부분만을 골라 제공한 것이다.
우선 신임 사장 선임과 관련해 김 전 수석은 2014년 6월15~19일 네 차례에 걸쳐 일정과 상황 파악, 대응 계획 마련 등을 기록했다. 6월16일자 메모에는 ‘홍보/미래, KBS 상황, 파악, plan 작성’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언론노조는 이에 대해 “길환영 사퇴 이후 KBS 사장 선임에 대한 계획을 작성하라고 홍보 및 미래전략수석에게 지시한 의혹이 든다”고 밝혔다.
청와대의 결정이 실질적인 영향력 행사로 이어졌음을 의심케 하는 대목들도 나왔다. 당시 KBS 구성원들은 사장추천위원회(사추위)를 통해 사장을 뽑자고 제안했지만 여권 추천 다수이사들은 6월30일 열린 이사회에서 이런 요구를 일축했다. 그런데 앞선 6월17일 메모에는 ‘KBS 노조, 16개 직능단체/사장 선임절차 제의/공영방송 영, 독, 일/수용 곤란/*사추위(김인규 사장)-여야 안분/방통위원장과 상의’라고 적혀 있었다. 언론노조는 “(청와대가)수용곤란하다는 입장을 정한 뒤 의논토록 지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청와대가 KBS이사회 다수를 점한 여권 추천 이사들의 성향을 체크하고 관리에 나선 정황도 기입됐다. 7월9일 여당 추천 이사 2명이 이탈하며 뜻하지 않게 조대현 후보가 사장으로 선임된 직후인 11일자 메모에는 ‘면종복배(앞에서는 복종하는 척하나 뒤에 칼을 품고 있다)’라는 단어가 쓰였다. 언론노조는 “공공기관 가운데 KBS이사들을 대표적인 면종복배하는 사람들로 꼽은 것으로 추정된다. 길 사장(길환영)을 해임시키고 ‘조대현’을 사장으로 임명제청한 것을 문제삼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앞서 7월3일, 4일에는 각각 ‘KBS 6명-조대현 7’, ‘KBS이사 우파 이사-성향 확인 요’라는 내용이 담겼는데 성재호 언론노조 KBS본부장은 “KBS 사장 선정과 관련된 판세를 미리 읽고 우려하거나 대응책 마련을 논의한 것으로 보인다”며 “(4일자 메모는) ‘조대현’으로 기우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 확인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비망록에는 정부 비판적인 KBS의 보도나 프로그램에 통제나 압박을 가한 것으로 보이는 내용도 담겨 있었다. 김 전 수석은 6월26일자 메모에 ‘KBS 추적60분 천안함 관련 판결-항소’라고 기입했는데, 이는 당시 2010년 천안함 사건 최종 보고서의 의문점을 다룬 ‘추적60분’에 대한 방송통신위원회의 경고(중징계) 처분이 위법하다는 법원의 1심 판결(6월13일)이 나온 후였다. 방통위는 해당 메모가 기입된 날로부터 약 일주일 후인 7월2일 서울고등법원에 항소장을 제출했다.
아울러 “일본 식민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부적절한 발언으로 낙마한 문창극 총리후보에 대한 KBS의 보도(7월2일, 9월5일), 세월호 당시 대통령 행적에 대한 보도(8월14일)가 언급된 부분도 존재한다. ‘2012년 KBS 파업사건-법원 무죄선고-노조 강성화 가속’ 등 노조에 대한 동향 체크까지 유추할 수 있는 내용도 언급됐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는 최성준 방송통신위원장이 조대현 사장 선임 후 이사회 장악에 실패한 책임을 물어 이길영 KBS이사장의 사퇴를 종용했다는 폭로도 나왔다. 당시 이길영 전 이사장은 8월 건강상의 이유로 갑작스레 사퇴하고, 방통위는 불과 이틀만인 29일 이인호 현 이사장을 내정했다. 김환균 언론노조 위원장은 “청와대의 항소 지시를 최성준 위원장은 그대로 이행했다. 이길영 전 이사장에 따르면 최 위원장이 사표를 내라고 종용했다”며 “방송의 독립성을 수호해야 하는 방통위원장이 앞잡이가 돼서 일을 했다는 의미다. 당장 물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노조는 이날 기자회견문을 통해 ‘박근혜 특검’대상에 언론장악 문제 역시 포함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