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영·최승영 기자 2016.11.22 22:27:08
“저는 언론의 비판이 당장은 아프더라도 이를 경청할 때 더 좋은 정부가 되고 국가발전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면서 오히려 취재활동을 지원하는 정부를 만들겠다.” 2007년 6월 당시 한나라당 대선주자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편집·보도국장 세미나’에 참석해 “정치와 언론은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 책임을 같이 지고 있는 동반자”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로부터 9년 후, 그의 말은 식언(食言)임이 드러났다. 비판언론을 특정하며 탄압하라는 지시를 내린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14일 TV조선의 보도에 따르면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2014년 7월15일자 비망록에는 박 대통령이 직접 시사저널과 일요신문을 언급하며 “끝까지 밝혀내야. 본때를 보여야.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하라는 주문을 했다고 쓰여 있었다.
실제 박근혜 정부 들어 청와대와 청와대 관계자를 비판하는 기사에는 명예훼손에 따른 민·형사상 고소·고발이 꾸준히 이어졌다. 박 대통령이 취임한 2013년 2월25일부터 올해 11월 중순까지 청와대가 언론사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 건수는 언론에 알려진 것만 해도 17건이다.
2014년 3월 “최순실씨의 전 남편인 정윤회씨가 박지만의 미행을 지시했다”는 요지의 박지만 EG 회장 측 의혹 제기를 보도한 시사저널을 비롯해 2014년 11월 정윤회 국정개입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 올해 7월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넥슨 1000억원대 처가 부동산 매매 의혹과 정운호 몰래 변론 의혹을 보도한 조선일보와 경향신문 등은 청와대를 견제하고 비판했다는 이유로 고소·고발을 당했다.
홍재원 경향신문 기자는 “소송을 통해 언론에 압력을 가하려는 국가기관이나 강한 권력을 가진 공직자들의 시도가 있다고 느껴진다”면서 “검찰수사를 지휘할 수 있을 정도라면 소송 제기 후 자신의 힘과 정책적 수단을 동원해 결과를 바꿔버릴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언론중재위 제소도 끊이지 않았다. 중재위에서 매년 발간하는 ‘2013~2015 언론조정중재시정권고사례집’과 중재위에서 받은 올해 자료를 종합하면 박 대통령 취임 이후 현재(15일 기준)까지 대통령 경호실·비서실 등 대통령 직속 기관의 중재위 제소 건수는 총 11건이었다. 이 외에도 우병우 전 수석, 허현준 행정관 등 청와대 관계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중재위에 청구한 것을 합하면 3~4건이 더 늘어난다.
조현일 세계일보 기자는 “최수규 전 중소기업비서관의 비위 의혹을 보도한 이후 중재위에서 세 차례나 조정심리를 갖고 비서관과 치열하게 싸운 적이 있다”면서 “오점을 남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조정이 실패하고 법원까지 가기엔 당시 정윤회 건을 취재하는 상황이라 불필요하게 시간을 뺏긴다고 생각해 반론보도문을 싣는 조건으로 조정을 끝냈다. 하지만 나중에 검찰에 가니 그게 또 발목을 잡았다”고 말했다.
극우 보수단체들이 소송을 걸면 검찰 수사로 이어지는 방식도 있다. 청와대나 권력 기관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에 대한 의혹을 보도한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이 자유청년연합을 비롯한 보수단체로부터 고발을 당한 경우나, 최순실씨의 태블릿PC 속 파일을 이용해 국정농단 의혹을 보도한 JTBC와 손석희 사장이 최근 어버이연합에 의해 고발당한 것이 한 예다.
법적 대응뿐만 아니라 청와대는 권력 기관을 동원한 대응에 나서기도 했다. 김영한 전 수석의 비망록에는 세계일보가 정윤회 문건을 보도한 당일 민정수석실이 ‘세계일보 공격 방안’을 논의하고, 사흘 뒤 김기춘 비서실장이 압수수색 장소로 세계일보를 거론한 내용이 쓰여 있다. 압수수색은 실제 이뤄지지 않았지만 보도 두달 뒤 서울지방국세청은 세계일보를 소유한 통일교 재단의 관련 회사에 대해 특별 세무조사를 실시했고, 지난 10월에는 조선일보 계열사인 조선뉴스프레스 등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으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고소·고발당한 기자들에 대한 과도한 수사가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검찰이 취재정보가 다수 포함된 휴대전화 통화내역과 SNS 경로 등을 추적해 그 내용을 모두 들여다보기 때문이다. 2013년 말 신동철 국민소통비서관의 인사외압설을 기사화한 시사저널 기자는 통화내역,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편집국 직통전화까지 모두 조회 당했고 인사외압설을 유포했다고 지목된 조선일보 기자도 통화내역과 SNS 경로를 추적당했다. 일부 기자는 휴대폰을 통째로 압수당하기도 했다. 한 주간지 기자는 “휴대폰을 뺏긴 채로 아직도 못 받고 있다”면서 “검찰에서 부당하다고 느낄 정도의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가 다양한 방식으로 비판언론을 탄압하는 이유는 결국 후속취재를 차단하기 위해서다. 형사의 경우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이나 경찰에 두세 번은 출석해야 하고, 민사의 경우 기사가 진실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증거를 수집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내야 해 제대로 보도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희상 시사인 기자는 “아무래도 민·형사 다 걸리고, 상대방이 패소해도 불복하면 피곤하긴 하다”면서 “후속 보도를 하고 싶어도 재판에 계류 중인 당사자이기 때문에 보복성으로 보도한다는 반격을 받을 수가 있어 위축이 된다. 그렇게 수족을 묶어버리는 게 바로 권력자들이 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성모 시사저널 기자도 “후배들에게 위축되지 말라고 얘기하지만 처음 취재했던 것만큼 겁 없이 덤비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다른 언론사가 기사를 받는 것을 꺼리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최성진 한겨레 기자는 “2014년 4월 청해진 직원이 청와대 신문고에 위험을 사전 고발했다는 내용을 보도했는데, 이후 청와대가 그 기사를 받아쓴 인터넷 언론사에 일일이 전화해 한겨레를 상대로 고소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면서 “하지만 고소를 해도 실익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던지 실제로 소장을 접수하지는 않았다. 추가 보도를 막기 위해 협박을 한 셈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언론계·학계 전문가들은 명예훼손죄·모욕죄가 언론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도구로 악용되고 있다며 법 개정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진봉 성공회대 교수는 “청와대 관계자 등 고위공직자들은 반론권이 충분히 보장돼 있다. 기자회견이나 보도자료 등을 통해서 충분히 반론할 수 있는데 그런 방법을 쓰지 않는 건 기자를 겁박하고 경고성 메시지를 날리기 위함”이라면서 “명예훼손 소송의 요건을 엄격히 제한해 거짓임을 인지하고 썼을 때만 처벌이 가능하도록 할 필요가 있다. 또 기자의 자유로운 취재를 보장해주기 위해선 명문화를 고민할 만도 하다”고 말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최승영 기자 sychoi@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