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영 기자 2016.11.02 13:16:38
언론 보도가 없었다면 권력의 일그러진 민낯이 이 만큼이라도 드러났을까. 언론이 비선실세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을 끈질기게 취재하고 보도하자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고, 최씨와 관련된 여러 의혹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청와대 참모진과 ‘문고리 3인방’은 퇴출됐다. 외국으로 도피한 최씨는 갑자기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 의혹이 실체가 됐지만 갈 길은 멀다고 기자들은 말한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이번 사안과 관련해 언론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양병운 TBC 기자는 “이번 보도에서만큼은 언론이 어느 정도 제 역할을 했다고 본다”면서 “보도 전후로 국민들 상당수가 기존에 갖고 있던 대통령이나 새누리당 등 집권 정치세력에 대한 인식을 바꿨다. 그만큼 이번 보도가 여론 형성에 상당한 역할을 끼쳤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종합일간지 한 부장도 “기자들이 ‘기레기’로 불리고 대다수 국민들이 언론 불신으로 김영란법에 찬성하는 등 언론의 위상이 추락했는데 이번 보도가 전환점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바라보는 국민들이 경악하고 분노한 것처럼 기자들 역시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 분노하고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사태 초기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 대부분 침묵하거나 이번 사안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언론에 처음 등장시킨 김의겸 한겨레 선임기자는 “다른 언론사들이 따라와 주지 않아 외롭고 고단했다”고 했다. 종합일간지 한 기자는 “안에서 말이 많았다”면서 “왜 처음부터 따라가지 못했는지, 따로 팀을 꾸려 대응하지 못했는지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JTBC 한 기자도 “지상파 한 동기가 JTBC 경력을 언제 뽑는지 묻기도 했다. 그 정도로 이번 최순실 보도에 대해 답답한 면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KBS와 SBS, MBC, YTN 등 방송사 내부에선 지난달 26일부터 성명과 결의대회 형식으로 자사의 보도현실을 비판하고 자성하는 목소리가 잇따라 나왔다. 권력의 눈치를 보며 특별취재팀 구성 요구를 묵살하고 관련 뉴스를 회피한 보도책임자들을 질타하는 움직임이었다. 한 방송사 기자는 “기사를 안 쓴 게 아니라 못 쓴 것”이라면서 “위에서 다 ‘킬’시켰으니 나갈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YTN 한 기자도 “최순실의 태블릿PC를 우리가 구해왔다면 보도할 수 있었겠느냐”면서 “청와대나 정부 여당, 대기업 등의 치부를 드러내는 보도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왜 못하는지 이번 기회에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최순실 보도에 경쟁이 붙으면서 사실관계가 확실치 않은 의혹성 기사나 본질과 무관한 가십성 기사가 쏟아져 나오는 것도 기자들을 자책하게 만들었다. MBC 한 기자는 “권력형 게이트에서 언론의 역할은 드러나지 않은 비리를 들춰내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최순실을 조롱하는 보도를 해 마치 고 노무현 대통령 때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다”며 “최순실이 여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했을까 싶다”고 말했다. 한 월간지 기자도 “대통령의 국가기밀 유출, 공적 기관의 사적 유용 등에 집중해야 하는데 최씨가 신었던 신발과 그 행적, 고영태씨의 과거 등 선정적인 것에 천착하는 행태가 후진적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언론이 궁극적으로 최순실 국정농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변상욱 CBS 대기자는 “늘 지금처럼 최고 권력을 향해 치열했어야 옳다. 그랬다면 비선실세 국정농단의 토양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이제부터는 최순실의 책임에서 최순실을 키운 언론의 책임을 묻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일보 한 기자도 “2014년 세계일보의 보도 이후 그 부분을 조금 더 파고들었어야 했다”며 “대통령 감시를 소홀히 하면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는 것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대부분의 신문·방송사들은 내부 비판을 수용해 특별취재팀을 구성하는 한편 공정보도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고 있다. 안수찬 한겨레21 편집장은 “1970년대 미국 워터게이트 사건 때는 대통령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확실히 밝히기 위해 2년에 걸쳐 보도가 이어졌다”면서 “그 일은 워싱턴포스트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사가 자신의 지면과 전파를 최대한 할애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국 언론이 지금의 결기를 좀 더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사실관계를 명명백백하게 밝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