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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로 꽃피우는 '기자의 꿈'

기자상 특별상 수상 김혜경씨, 델레트헤씨

강아영 기자  2016.06.07 17: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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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생활 왜 하는지에 회의
한국일보 관두고 그린피스 활동
원전 사고 현장 담겠다고 결심
기획서 만들어 한국일보에 제안


사고 발생 30년 지난 체르노빌
“사람이 살고 먹고 일하고 있어”
기획기사 12편 열띤 호응 속 연재
“기자와 프리랜서가 협업했으면…”


지난 2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회견장. 제308회 이달의 기자상 시상식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마지막 수상자가 호명됐다. 한국일보에 ‘체르노빌 30년 후쿠시마 5년 현장리포트’를 보도해 특별상을 수상한 프리랜서 기자 김혜경씨와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씨였다.



김 기자는 단상에 올라 “아직도 우리나라에는 프리랜서 기자가 쓴 기사를 구매해 게재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면서 “사전에 직접 계약을 하고 취재를 지원해준 한국일보 관계자와 선후배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김 기자는 한국일보 출신이었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2008년 한국일보에 입사했다. 당시는 미국 발 금융위기로 취업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고등학생 때부터의 꿈을 이뤘다는 생각에 김 기자는 감사한 마음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취재 현장을 뛰어다녔다. 태안반도 기름 유출 사고, 우면산 산사태, 샘물교회 피랍사건부터 조폭 취재까지 그는 ‘여’기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일부러 험한 취재에 자원했다.


그러나 4년차가 된 어느 날 그는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자가 꿈이었지만 어떤 기자가 되어야 하는지는 모른 채 기자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깊이 고민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뭘 좋아했는지, 뭘 하고 싶은지 무너져 버린 상황이었죠. 내가 어떤 기사를 쓰고 싶은지 알기 위해서는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좀 더 경험을 쌓고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2011년 한국일보를 관두고 그는 1년 정도 해외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다.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끝난 후 한국에 돌아왔을 때 다시 일을 시작하기는 쉽지 않았다. 일할 준비는 되어 있었는데 갈 곳이 없었다. 기고글로 연명하다 그는 2013년 5월 그린피스에서 일을 시작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을 취재했을 때부터 환경과 약자들에게 관심이 많았던 것이 계기가 됐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런지 이전에는 원전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러다 2011년 후쿠시마를 취재하면서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끼게 됐죠. 한국에 돌아와서도 책을 찾아보며 에너지 시리즈를 연재하기도 했는데 더 공부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린피스에서 그는 언론사를 담당하며 캠페인을 진행하고 기획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린피스에서 나오는 자료를 공부했다. 과학적이고 타당한 것들이 대부분이었지만 한편에서는 아쉬운 마음이 스멀스멀 솟아올랐다. 현장의 이야기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 어느 날 그는 제안서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프리랜서 기자로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취재해야겠다고 작정한 것이다.


“그린피스를 그만두고 사비를 들여 후쿠시마를 방문했어요. 그곳에서 원전 문제를 취재했던 기자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언론학과 교수님, 언론계 선배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죠. 채택될 수 있는 제안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즈음에 국경 없는 기자회 일본통신원의 소개로 프랑스 출신 사진기자인 델레트헤를 만났고, 다행히 한국일보 선배들이 제안서를 좋게 봐줘 기획을 시작하게 됐죠.”



취재를 시작하기 전 그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동일본 대지진 취재 때 우왕좌왕했던 경험을 되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어떤 것을 조심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같이 취재했던 다른 기자가 피폭된 것을 보고 마음고생을 한 적도 있었다. 그는 그린피스에서 20년 넘게 일해 온 얀 반데 푸트 활동가의 조언에 따라 철저히 준비했다. 방진복을 꼼꼼하게 챙겼고 현장에서의 행동 수칙, 방사선 계측기 다루는 법 등을 익혔다. 덕분에 델레트헤 기자와 김 기자 모두 피폭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지난해 8월부터 일본,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4개국을 돌아다니며 취재를 시작했다. 취재는 역시나 수월하지 않았다. 벨라루스에서는 노골적인 취재 방해를 받았고 일본에서는 외국인이었기에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시간이 걸렸다. 친절한 인심도 때론 독이었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주민들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음식을 권해 곤란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음식을 권할 땐 갈등을 많이 했어요. 사실대로 말하면 상처 받을까봐 이도 저도 못 하는 딜레마가 있었죠.” “벨라루스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땐 두려웠던 게 사실이에요. 우리를 따라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국경을 넘을 때도 이것저것 검사를 당하느라 장시간이 걸렸죠.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외국인에게 속내를 털어놓게 하는 거였어요. 일본에 여러 번 출장을 간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델레트헤)



직접 찾아간 현장은 상상과는 달랐다. 철저히 봉쇄돼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사고 발생 후 30년과 5년이 흐른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먹고, 일하고 있었다. 생계를 위해 사고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사람과 고향을 떠나지 못한, 떠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두 기자는 학자나 단체 관계자 외에도 오염 현장에서 생업을 하며 살아가는 농부, 어부, 원전 노동자 등 80여명을 인터뷰했다.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어요. 국가적인 재난이 벌어졌을 때 과연 희생당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싶었죠. 자연과학적으로 방사능 수치를 이리저리 보여주는 것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용당했고 희생당했는지, 그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사회과학적 접근법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올해 초부터 12편의 기획기사가 보도됐다.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기사였다. 주변을 비롯해 독자들의 반응은 좋았다. 1~2번을 빼고는 포털 사이트 메인에 계속 기사가 올라갔고 독자들에게도 많은 메일을 받았다. 관계기관에서는 강연 요청이 들어왔고, 한 대학 강사는 기사를 교재로 쓰고 싶다고 연락해오기도 했다. 책으로 내자는 제안도 받았다. 김 기자는 현재 전북 전주에 자리를 잡고 책 출간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안에 내겠다는 것이 목표다.


두 기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프리랜서의 삶은 정해진 것이 없기에 잠시 주저했지만 델레트헤 기자는 유럽의 난민 문제에, 김 기자는 전쟁 피해 여성들에 관해 취재하고 싶다고 했다. 김 기자는 한 마디 더 덧붙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펜기자가 프리랜서의 삶을 사는 것이 막막한 곳이에요. 다음의 뉴스 펀딩이나 오마이뉴스 외에 자기 콘텐츠를 팔 수 있는 시장이 없죠. 매일매일 부지런히 기록하고 있는 현장 기자들과 프리랜서 기자들이 앞으로 서로 협업하고 상생하는 관계가 됐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