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우 기자 2016.05.03 21:04:21
“야 반대편에 서야지.” “저리 비켜요. 다쳐요.” 다급한 외침이 귀에 먹먹하게 울린다. 고개를 돌리니 수십 명의 의경들과 취재진이 뒤엉켜있다. 말다툼과 고성, 카메라 플래시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흔들리는 화면 안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스마트폰을 반대편으로 기울여보니 다른 시선이 잡힌다. 취재진의 열띤 경쟁. 이른 아침부터 모여든 100여명의 카메라 기자들은 잔뜩 인상을 쓰고 저마다 주요 장면을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이다. 갖가지 소음 속에서 마치 내가 그 현장의 중심에 선 듯한 착각에 두려움이 엄습한다.
지난해 12월 서울 종로구 조계사 앞. ‘민중총궐기’ 집회 참가 뒤 조계사로 피신한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24일 만에 경찰에 체포됐다. 한국경제 뉴스래빗은 360카메라로 아수라장이 된 현장을 담았다. 페이스북에서는 3000명이 넘는 유저가 뉴스를 보고 현장의 주인공이 된 듯한 체험을 했다. 가상현실(VR) 기술이 뉴스로 소비되며 시민들의 삶에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내가 주인공” 착각 일으키는 VR의 매력
최근 국내외 언론사들은 다양한 형식의 VR뉴스를 쏟아내고 있다. 올 초 월드 모바일 콩그레스(WMC)에서 VR이 화두로 떠오른데 이어, 지난달에 열린 페이스북의 F8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마크 주커버그 최고경영자가 인공지능(AI),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등을 강화하는 기업으로 변신하겠다고 공언하며 더욱 고삐를 당기고 있는 모습이다. 최근 미국 나이트재단 보고서는 “장기 성장 전망에 의문부호가 없는 건 아니지만 2016년은 VR 저널리즘에 있어 중요한 한 해로 자리매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지난해 미국 12개 언론사가 내놓은 VR프로젝트는 60여건. 뉴욕타임스는 구글 카드보드 100만개를 배포하고, 지난해 11월 가상현실로 다큐 영화 ‘난민’을 제작해 반향을 일으켰다. CNN도 민주당 대선후보 토론회를 VR 영상으로 중계했다.
VR보도는 시청자가 실제 사건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에 파급력과 전달력이 상당하다. VR뉴스 소비자들은 현장 속에서 주인공이나 관찰자가 된다. 주로 360도 카메라로 촬영해 이어붙이는 방식으로 제작되는 VR뉴스는 초반보다 카메라의 가격 부담도 줄어 제작 문턱이 낮아지고 있다. 길 가던 시민들도 누구나 VR 기기를 꺼내 목격한 현장을 찍을 수 있고 이를 언론사에 제보하거나, 직접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하는 것도 가능해진 셈이다.
VR콘텐츠에 주목하는 언론사들
최근 우리나라 언론사들도 자사의 뉴스앱이나 페이스북, 유튜브 플랫폼을 통해 VR콘텐츠를 속속 내놓고 있다. 조선일보는 올 초 ‘VR조선’ 앱을 출시, 전용 콘텐츠를 배포하며 드라이브를 내걸었다. 지난해 말 배포한 카드 보드 1만개는 금세 동이 났다. 경쟁사의 한 기자는 “윗선에서부터 VR과 관련한 것에 전폭적으로 지원을 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걸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조선일보가 지난주에 공개한 콘텐츠까지 포함해 지금까지 제작한 VR뉴스는 총 14건. 4~6명의 제작 인력이 전문카메라인 고프로 6대를 동원해 만든 VR기사는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한다. 조선일보 디지털전략팀 관계자는 “광화문에서 진행된 핑키칙스의 ‘걸리쉬 댄스’ 등과 같이 역동적인 콘텐츠가 특히 인기가 많다”며 “다른 매체들이 사건사고 현장 위주로 잡았다면, 우리는 기획력을 살려 재미와 저널리즘을 접목시키는 콘텐츠를 생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속가능한 콘텐츠 선정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우리는 7~10일마다 정기적으로 VR콘텐츠를 공개하고 있다”고 했다.
한국경제도 ‘360도 현장’ 코너를 통해 대규모 집회시위나 현장검증, 극한 한파 체험 등 다양한 VR콘텐츠를 내놨다. 5명의 소수로 이뤄진 뉴스랩에서 영상에디터가 주도적으로 VR제작을 담당하고 있다. 지금까지 유통된 VR 콘텐츠는 15여건. 한국경제는 지난해 11월 국내에 없는 리코세타 카메라를 직구를 통해 구입, 조계사 현장을 담아 ‘국내 최초 VR 방송’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한국경제 뉴스랩의 김민성 팀장은 “VR뉴스는 시선을 분산시키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보여주고자 하는 바’에 어떻게 몰입하게 할지가 난제”라며 “다양한 의견이나 시점이 있는 주제를 골라서 독자가 선택하도록 하되, 자막이나 시점을 따라갈 수 있게 화살표를 지정하는 등 완결성을 높이는 게 관건”이라고 설명했다.
JTBC도 개표방송이나 고척 스카이 돔 등 페이스북의 ‘360VR’ 코너를 통해 기획기사를 내놓고 있다. JTBC가 그간 선보인 VR뉴스는 10여개. 특히 롯데월드 타워 위에서 360카메라로 서울의 풍경을 담은 영상은 페이스북에서만 1만4000여명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JTBC 장혜수 디지털뉴스룸 부장은 “스포츠나 콘서트중계 등 오락요소가 있는 콘텐츠에 적합한 기술이라 보도에는 아직 실험 단계”라며 “카메라 뒤쪽을 보여주면 의미가 있을만한 아이템을 찾아 리포트에 어떻게 반영을 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기존에 130도 카메라로 보여주던 것에서 360도로 확장되다보니 엄청난 데이터를 차지하는 것도 해결해야 할 과제”라고 설명했다.
‘반짝 유행 vs 차세대 저널리즘’ 엇갈린 전망
업계에서는 VR보도의 미래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반짝 유행이라고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 차세대 저널리즘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들은 모두 투자대비 효용성을 강조한다. 값비싼 장비와 추가 인력 등 돈을 들인 이상의 가치를 내야 한다. 한 일간지의 온라인 부서 기자는 “촬영은 한다 해도 편집할 인력이 없어 문제”라며 “일부 신문사의 경우, 따로 업체에 의뢰를 해야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했다. 또 다른 일간지의 온라인 부서 기자도 “완성도있는 VR기사를 만들었다고 해도, 유통과정에서 이게 먹힐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다.
VR 자체가 가진 특수성도 극복해야하는 과제다. VR과 어울리는 가치가 있는 현장이 많지 않은데다 실제 구현하면 혼돈스럽게 표현되기 일쑤다. 한국경제 뉴스랩 김민성 팀장은 “VR콘텐츠는 게임 등 엔터테인먼트의 요소가 강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를 흐트러뜨리고 왜곡 우려도 있어 뉴스로 접목하기에는 아직까지 한계가 있다”면서도 “독자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들이는 장점이 있기 때문에 이런 효과를 극대화하는 촉매제로써 저널리즘에 적용할 수 있다”고 했다. 조영신 SK경제경영연구소 박사는 “VR시장은 분명히 커지겠지만 이 기술이 저널리즘과 보도에서도 수익을 낼 수 있을 지는 미지수”며 “아직 VR뉴스에 어떤 스토리텔링을 입혀야할지 문법이 전혀 갖춰지지 않은 초기 단계인 만큼 지켜봐야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VR뉴스가 수익성을 내려면 결국 그 위에 광고를 레이아웃으로 얹는 방법인데 아직 기술적으로 구현되지 않고 있어 (수익성이나 장래성을) 확신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