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자사 보도에 대한 공정방송 감시활동을 한 기자들을 징계하면서 이에 대한 기수별 성명이 사내 게시판 등에 줄을 잇는 가운데 사측이 기자들의 성명을 삭제하는 일이 발생했다.
KBS 관계자 등에 따르면 지난 25일 밤 9시43분 보도본부 39기 28명의 기자들이 올린 기수 성명이 26일 오전 돌연 사내 게시판에서 종적을 감췄다. ‘전자게시 관리지침’을 근거로 사측이 성명서를 삭제해 버린 것이었다.
해당 성명은 최근 인사위원회에 회부돼 ‘감봉 6개월’ 등을 받은 정홍규·김준범 기자에 대한 사측의 징계를 두고 해당 기수의 입장을 밝힌 것이었다. 삭제된 성명에는 “믿을 수 없습니다, 선배 기자의 전화 한 통이 징계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부끄럽습니다, 부당한 징계 앞에 무기력한 우리가. 절망합니다, 앞으로 논쟁이 사라질 회사의 미래에. 분노합니다, 징계의 칼날을 휘두르며 입을 막으려는 치졸함에(이상 전문)”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사측은 “성명서의 일부 내용이 해당 근거의 ‘게시금지 사항’에 해당돼 삭제 조치를 했고, 건전한 비판을 넘어 비방 수준이라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들이 든 근거는 전자게시 관리지침 제3조 제3항 제5호 및 제4조 제2항이다. 이 조항에 따르면 해당 게시물은 ‘특정인 또는 단체를 비방, 중상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 삭제된 것이다. 게시물이 욕설이나 실명을 거론하고 있진 않지만 비판 대상이 ‘징계를 한 사람’이라는 게 분명해 특정된 것이고, 뒷부분으로 갈수록 어조가 강해진 것을 문제 삼은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정홍규·김준범 기자는 각각 언론노조 KBS본부(새노조) 공정방송추진위원회(공추위) 간사로서, 또 KBS기자협회 공정방송국장으로서 단체협약과 편성규약에 따라 자사 보도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다가 지난 23일 인사위원회에 회부됐다, 정 기자는 지난해 11월14일 KBS ‘뉴스9’을 통해 보도된 <서울 시내 교통 마비에 논술 수험생 발 ‘동동’> 리포트를 제작한 기자와 부서장에게 전화를 걸어 경위를 파악하고 보도근거 부족에 대해 지적한 것이, 김준범 기자는 지난 1월20일 같은 프로그램의 중계차 연결 코너 <청년 대한민국 현장을 가다. 대륙 전역 배송>의 리포팅 기자에게 보도된 업체의 선정 배경을 물은 점 등이 발단이 돼, 각각 ‘감봉 6개월’, ‘견책’의 징계를 받고 재심청구를 예정하고 있다.
KBS 허리연차 한 기자는 “2001년에 입사했지만 (사내 게시판의) 기수 성명이 삭제되는 경우는 처음 겪었다”면서 “황당한 일”이라고 토로했다. 기수 성명이 삭제된 39기 기자들은 기수차원에서 논의를 진행 중인 가운데 주말 전 백지성명을 게시하는 방안 등을 두고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KBS내부는 두 기자에 대한 징계를 감행한 사측을 비판하는 목소리로 들끓고 있다. 특히 사내 게시판, 보도정보 게시판 등에는 연일 기수별 성명이 잇따르면서 26일 오후 6시 현재 총 10개 기수(27·28·29·30·33·34·35·37·38·39기)가 징계의 부당함과 철회를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성명을 올린 상황이다.
26일 사내 게시판에 기수 성명을 올린 35기 기자들은 “선후배 간 수평적인 논쟁을 통해 후배들은 보도국 내부에 축적된 지혜를 배우고 선배들은 참신한 발상을 수혈해다. 이 상부상조의 전통이야말로 기자 사회와 건전성을 담보하는 미덕”이라며 “노조나 협회가 취재기자에게 직접 문제제기를 했다고 한 들 그것을 부당한 압력으로 규정하고 제재하려는 것은 이 오랜 전통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라고 밝히며 징계 철회를 요구했다.
29기, 37기 기자들도 이날 보도정보 게시판을 통해 입장을 밝혔다. 37기 기자들은 “후배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보도의 사실관계를 물은 죄로 내려진 징계다. 전화가 보도에 대한 부당한 개입이 되고, 직장 내 질서 훼손이 되는 것을 보니 실망이 터져나온다”면서 “KBS보도를 모니터하는 노조 간사와 기협 국장이 보도의 사실관계조차 묻지 못한다고 하면 대체 누가 물어야 하는 것이냐”라고 되물었다. 그러면서 “이번 징계로 선후배 간의 치열한 토론과 고민이 사라질 것”이라며 “그것을 바랐다면 성공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KBS 사측은 26일 ‘2월 정례 공정방송위원회’ 개최거부를 통보했다. 새노조 관계자에 따르면 KBS 노사는 이날 정례 공정방송위원회를 열어 ‘두 기자의 징계 건’ 등 총 5건의 사안에 대해 논의하려고 했으나 사측의 거부로 열리지 못했다. KBS 사측 관계자는 “안건에 대한 이견 등이 있어 연기하자고 통보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확한 날짜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