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영국 총선을 둘러싼 아주 익숙한 풍경

[기고] 정제혁 KBS 탐사제작부 기자

정제혁 KBS 기자  2015.05.27 13:48:52

기사프린트

부정확한 여론조사 민심 왜곡
방송 ‘편향된 의제’ 선정 동조


이번 5월 영국 총선이 대다수 예상과 달리 보수당의 완승으로 끝난 직후 BBC의 시사토론 프로그램 ‘Question Time’ 제작진은 케이크로 모자와 킬트 치마를 만들어 패널 두 사람에게 각각 선사하는 이색 장면을 연출했다. 자유민주당 당수를 지낸 원로 정치인 패디 애쉬다운과 과거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 국정홍보를 담당한 막후 실력자 앨리스터 캠블이 바로 달갑지 않은 선물을 받고 쓴웃음을 지은 이들이다. 두 사람이 총선 직후 보수당의 승리와 스코틀랜드민족당의 약진, 자유민주당의 몰락을 예상한 출구조사 결과를 도저히 믿기 어렵다며 만일 이 같은 예측이 맞는다면 자신의 모자와 킬트 치마를 먹어 치우겠다고 호언장담한 사실을 꼬집은 유쾌한 영국식 농담이다. 


현지 여론조사 회사들과 언론들도 ‘humble pie를 먹어야’(잘못을 저질러 치욕을 당하고 사죄를 하는 상황을 이르는 영어 표현)하는 뼈아픈 성찰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어느 한 쪽 정당도 과반을 넘지 못하는 ‘hung parliament’ 가능성이 90% 이상이라고 보았던 영국여론조사협회 BPC측은 예측이 처참하게 빗나간 이유를 공식 조사 중이다. 총선 보도의 편향성에 대한 언론 학계 등의 비판도 이어진다. 


카디프대학교 저널리즘 연구소가 BBC와 ITV등 5개 방송사의 주요 뉴스를 분석한 결과, 보수당에게 유리한 경제 이슈와 노동당과 스코틀랜드민족당의 연정구성 가능성 등이 부각된 반면 노동당이 주력하는 선거 어젠다인 공공의료서비스 NHS와 주거 복지를 강화하자는 사회적 논의는 소홀하게 다뤄진 것으로 나타났다. 보수당은 총선 결과 노동당과 스코틀랜드민족당의 연정이 성립되면 잉글랜드의 이익이 침해될 것이라는 불안감을 유권자들에 퍼뜨리는 공포 마케팅을 구사했다. 뿌리 깊은 지역감정을 역이용한 아주 효과적인 선거 전략이었다. 상당수 잉글랜드 주민들이 보수당으로 이른바 전략적 투표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현지 방송사들은 부정확한 여론조사 결과를 토대로 노동당과 스코틀랜드민족당의 연정 가능성을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편향된 신문들의 ‘의제 선정’에 방송사들이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동조했다는 지적은 더욱 뼈아픈 대목이다. 보수 성향 신문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산업계 인사들과 소규모 사업자들의 보수당 지지 선언 사실을 게재할 때마다 당일 현지 방송사 뉴스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해 집중 보도한 반면 공중보건과 경제 분야 전문가들이 집단 의사 표명을 통해 현 정부의 복지 정책과 긴축 드라이브가 과연 적절한지 의문을 제기해도 그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묻히고 말았다. 


약 1년 뒤면 한국도 제20대 총선이다. 영국 총선 보도 편향성 논란에서 우리들이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점은 없을까? 첫째, 여론조사 결과를 무턱대고 반복 인용하는 보도 행태는 국민들의 민주적 의사 표현행위인 투표를 왜곡하고 오도할 위험성이 있다는 점이다. 둘째, 언론이 정치세력 간 암투와 제휴 등 정치공학에 치우친 기사를 양산하면 특정 정당의 선거 전략에 들러리를 서거나 바람잡이 역할로 전락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다양한 정책 이슈들을 깊이 있게 다뤄야 하고 동시에 부문별로 치우침이 없도록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는 점이다. 


총선일이 다가올수록 각 정당의 이른바 스핀 닥터들은 기자들의 눈과 귀를 가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보도를 이끌어 내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경주한다. 품질이 의심스런 각종 여론조사 결과들이 연일 롤러코스터를 타며 춤을 춘다. 정치를 오락화하는 데 혈안이 된 기형적인 일부 언론은 아랑곳하지 않고 얼치기 예측·분석을 쏟아낸다. 북한은 또 난데없이 동해상으로 미사일 몇 발을 발사한다. 복지 강화와 이를 위한 증세, 연금 개혁 등 사회 이슈는 실종된다. 각 부문에서 성장의 발목을 잡는 ‘불평등’은 언론의 비판과 검증 대상에서 멀어진다. 무소불위의 ‘시장’이 득세하고 민주주의는 서서히 질식한다. 물론 나는 이 같은 불길한 생각들이 내년 이 맘 때 모두 쓸데없는 기우로 드러날 것임을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