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고은 기자 2015.04.22 13:32:11
이완구 총리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자진사퇴는 없다”며 버티던 이완구 국무총리는 지난 20일 전격 사의를 표명했다. 취임 63일 만이자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연루된 지 열흘 만이다. 지난 10일 경향신문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 인터뷰 단독 보도와 ‘성완종 메모’ 발견으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불거진 이후 이 총리는 ‘사정 대상 1호’로 여론의 지목을 받아왔다. 이 총리는 성 전 회장과의 친분을 극구 부인하며 ‘결백’을 주장해왔지만, 그의 거짓말은 외려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지난 13일 국회 대정부질문에 참석해 성 전 회장과의 연관성을 부인한 다음날, 경향은 이 총리가 2013년 4월 부여·청양 국회의원 재선거에 나섰을 당시 선거자금 3000만원을 건넸다는 성 전 회장의 인터뷰를 공개하며 이를 반박했다. 그래도 “돈 받은 증거가 나오면 제 목숨을 내놓겠다”며 버티던 이 총리에게 일격을 가한 것은 다름 아닌 비타민 음료였다. 경향은 지난 15일 성 전 회장이 2013년 이 총리의 선거사무소를 찾아가 3000만원이 든 비타500 박스를 전달했다는 성 전 회장 측 인사의 증언을 보도했다. JTBC와 중앙일보는 성 전 회장과 이 총리가 20개월간 23차례 만난 비망록 기록을 보도하며 이 총리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총리의 해명이 번번이 거짓말로 확인되고, 연일 새로운 정황과 증거들이 추가로 드러나자 이른바 보수언론들도 일찌감치 이 총리에게 등을 돌렸다. 조선일보는 지난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중남미 순방을 떠나기 앞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긴급 회동을 갖고 이 총리 거취 문제 등에 대해 “다녀와서 결정하겠다”고 말한 것을 ‘이 총리 교체로 가닥’이라고 해석했고, 동아일보와 중앙일보도 이 총리가 스스로 거취를 정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 주말 사이 이 총리가 성 전 회장과 최근 1년간 200차례 넘게 전화를 주고받은 사실이 SBS 보도로 드러나면서 더욱 사면초가에 몰린 이 총리는 결국 백기투항을 선택했다.
이 총리의 의혹을 파헤치고 거짓말을 밝혀내는 데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특히 지난 10일부터 단계적으로 이뤄진 경향신문의 ‘폭로’는 파괴력이 컸다. 지난 15일자 지면에 ‘엠바고’를 건 사실은 인터넷 상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음날 신문 1면이 기다려지기는 실로 오랜만”이라는 기대감 섞인 반응도 많았다.
일간신문과 종편 등의 연일 이어지는 ‘단독보도’ 행진 속에 공영방송의 존재감은 희미했다는 지적도 나왔다. KBS와 MBC는 저녁 메인뉴스에서 경남기업 비자금이나 압수수색과 관련해 몇 건의 단독 보도를 내보내긴 했지만, ‘성완종 리스트’의 실체와 핵심 의혹에 접근하는 보도에는 미진한 모습을 보였다. 이 총리와 관련해서도 새로운 증언을 확보하기보다는 당일 신문에 보도된 내용이나 검찰 수사 상황을 단순 전달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특히 KBS는 이 총리 사퇴 불가피론으로 여론이 기운 상황에서도 애써 이를 외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17일 KBS 1TV 아침 메인뉴스인 ‘뉴스광장’에서 ‘이 총리 결단해야’라는 제목의 뉴스 해설이 강선규 보도본부장의 지시에 의해 ‘국정혼란 우려된다’로 일부 수정·삭제돼 방송된 것이 한 사례다.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심각한 공정방송 저해 행위”라고 비판하며 강 본부장 문책을 요구하고 있다.
이완구 총리가 물러났지만, 검찰 수사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성완종 메모’에는 전·현직 비서실장 등 8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경향 인터뷰에선 이 중 5명의 이름이 언급됐다. 밝혀진 것보다 앞으로 밝혀낼 진실이 더 많다는 뜻이다. 하지만 21일 현재까지 검찰 수사와 언론 보도는 이완구 총리와 홍준표 경남도지사 2명에게만 집중되는 분위기다. 야당 등 일각에서 ‘꼬리 자르기 수사’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실제 경향은 지난 20일 4면 기사에서 검찰이 혐의가 뚜렷한 이완구 총리와 홍준표 지사에 수사를 집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경향은 “‘성완종 리스트’를 수사 중인 검찰이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 일부를 ‘우선 수사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19일 알려졌다”면서 “현실적인 수사계획 수립이라고 하지만, 대통령 주변의 권력 실세들이란 점에서 ‘봐주기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조선일보 등 일부 언론도 현 정권을 겨냥하던 화살을 정치권 전반으로 돌리는 분위기다. 정부여당이 주장하는 ‘정치개혁’ 프레임과 맥락을 같이 하는 셈이다. 조선은 지난 17일 ‘與野인사 14명 ‘성완종 장부’ 나왔다’란 기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중진인 K의원과 C의원 등 야당 정치인 7~8명에 대한 로비 자료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며 “정치권은 여야 할 것 없이 성완종발(發) 후폭풍에 휩싸일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검찰은 해당 ‘로비 장부’의 존재를 부인했지만 조선은 굽히지 않았다. 조선은 21일 “정치권에서 오가고 있는 불법 정치자금 전반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황교안 법무장관의 발언을 1면에 보도하면서 “수사팀에서 이미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한 여당 정치인은 물론 야당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수사가 상당 부분 진척됐음을 시사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새정치연합은 “사안의 본질을 흐리려는 검찰의 치고빠지기식 언론 플레이”라고 비판하며 “박근혜 정권은 검찰의 비겁한 언론 플레이로 국면을 바꿔보겠다는 얄팍한 꼼수를 즉각 중단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