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로 시작해 ‘수신료’로 끝난 토론회였다. 8일 서울 목동 방송회관에서 열린 ‘한류 콘텐츠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대토론회’. 장장 4시간 가까이 진행된 이날 토론회의 요지는 간단했다. 한중FTA와 중국 거대자본의 위협 속에 한류를 지속하고 위기의 방송 산업을 살리기 위해선 재원 확보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 KBS 수신료 인상과 광고 규제 완화가 불가피하다는 게 요지였다. 방송의 공영성이니 공정성이니 하는 것은 거추장스러운 수식에 불과했다. 방송광고 규제는 물론 KBS 수신료 인상까지 이미 ‘산업’의 논리에 함몰된 셈이다.
한국방송학회가 주관한 이날 토론회는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 박민식 새누리당 의원과 우상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공동 주최하고 방송통신위원회와 한국방송협회가 후원했다. ‘거든 손’이 많은 만큼 국민의례부터 방송학회장의 개회사와 인사말, 축사에만 거의 1시간이 소요됐다. 공동 주최자인 박민식, 우상호 의원이 인사말을 전하고 홍문종 미방위원장과 장병완 새정치연합 의원은 영상으로, 새누리당 미방위 간사인 조해진 의원, 최성준 방통위원장, 안광한 방송협회장, 조대현 KBS 사장, 신용섭 EBS 사장은 직접 나와 축사를 했다. 축사가 길어지면서 뒤에 나온 조대현 사장과 신용섭 사장이 다소 민망해 할 정도였다.
이들은 지금이 위기의 방송 산업을 구할 ‘골든타임’이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방송 산업이 대내외적인 압력으로 휘청대고 있는 마당에 자기 파이를 지키기 위해 골몰할 게 아니라 ‘국익’이라는 큰 그림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조해진 의원은 “중국 자본의 거대한 물결에 이제 막 봉우리가 핀 한류가 꽃도 제대로 피우기 전에 꺾일 위기에 처했는데, 우리 내부는 한류를 지속 발전시키기 어려운 환경”이라며 “제일 아쉬운 건 재원이다. 재원이 있어야 인재도 붙잡고 예술성도 작품으로 구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광고제도 개선 등 방통위가 추진하는 정책 방향이 큰 틀에서 옳다고 생각한다. 소소한 이해관계의 불일치를 조정하더라도 국익 위해 옳다고 생각하면 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화답하듯 최성준 방통위원장은 “공영방송이 안정적 재원을 기초로 공영방송답게 발전할 수 있도록 수신료 인상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라며 “수신료 인상은 KBS의 공익성 증진 뿐 아니라 전체 미디어 산업 생태계에도 활력을 불어넣는 중요한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숨을 헐떡이는 붕어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물 한 방울”이라며 “변화의 전기를 마련해 대내외적 압력을 받고 있는 한류 콘텐츠가 재도약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덧붙였다.
조대현 KBS 사장도 “왜곡된 한국 미디어 콘텐트 산업의 생태계를 살려나갈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목마른 붕어에게 한 방울 물방울이 필요한 것처럼 KBS 수신료 현실화라고 생각한다”면서 “수신료 현실화는 어떤 다른 이익도 개입되지 않은 국가와 국민의 이익만 생각하는 타협과 양보의 결과물이 되어야 한다”고 맞장구를 쳤다. 신용섭 EBS 사장 역시도 “K-POP과 드라마 한류를 이을 ‘교육 한류’가 베트남과 남미 등에서 일고 있다”면서 이를 위해 “수신료 현실화에 따른 공영방송 재원 확보가 뒷받침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한류와 수신료 현실화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을까. ‘한류 확산’은 KBS가 수신료 인상안에서 제시한 ‘10대 약속’ 중 하나이기도 하다. 수신료 현실화로 확보한 재원으로 “세계 수준의 콘텐츠 제작으로 문화강국을 이루겠다”는 목표다. 이날 토론회에선 “한류가 상당부분 신화적으로 구축되었고, 우연의 효과에 기인한 바가 크다”(정준희 중앙대 교수)는 전문가의 지적이 나왔지만, 한중FTA와 한류가 수신료 현실화의 명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되는 현실이다.
이미 수신료 현실화는 당위적 과제가 되었다. 수신료 인상의 열쇠를 쥔 국회 미방위 여야 의원들도 수신료 인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사실상 공감대를 형성한 상태다. 여든 야든, 선뜻 나서지 않을 뿐이다. 공정성 확보가 우선이라는 비판적 여론이나 준조세 성격의 수신료를 올리는 것 모두 정치권으로선 부담이다. 그럼에도 정윤식 강원대 교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수신료는 여야, 보수와 진보의 대타협”이라며 “수신료는 돈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보수와 진보가 갈등하는 망국을 돌파할 하나의 수단이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강형철 숙명여대 교수는 “광고를 뜯어먹고 사는 한국 사회 지형에선 품질 높은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나오기 힘들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 중 하나가 공적 기금인데, 대표적인 게 수신료”라면서 “이제는 선택해야 할 때”라고 밝혔다. 지성우 성균관대 법대 교수도 “이제 기로에 왔다. 국민들은 수신료를 약간 더 부담하고 제대로 된 공영방송, 청정지역의 공영방송을 선택할 것인가, 상업방송화 되어가는 방송시장을 방치해서 공영방송을 포기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신료 인상과 광고 재원 확보는 한 줄기로 엮여 있다. KBS가 수신료를 인상한 만큼 광고를 축소하면 그 낙수 효과가 전체 미디어 산업에 미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박현수 단국대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종편 4개 채널, IPTV 3개 사업자를 무분별하게 벌려놓은 잘못된 정부 정책 아래 서로 살기 위해 싸우는 가슴 아픈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라도 수신료를 통해 광고를 조금이나마 줄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렬 성신여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한발 더 나가 “KBS가 아예 광고를 하지 못하도록 수신료를 올려주고, 남는 광고는 좋은 콘텐츠를 만드는 회사에 가도록 잘 하는 사업자의 인센티브를 극대화 하는 시장을 만들어주도록 광고 시장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고 규제도 풀 수 있는 만큼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노동렬 교수는 “글로벌 시장에 나갈 때 가격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초판 비용을 안정적으로 회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지상파에 방송해서 일단 제작비를 100% 뽑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광고주가 원하는 광고 시스템을 늘리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국광고학회장을 맡고 있는 박현수 교수도 광고제도의 전면 개선을 주장했다. 박 교수는 “세계적으로 지상파 TV 광고비 점유율은 30% 중·후반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국내 지상파 TV 광고 점유율은 2014년 18.1%까지 떨어졌다”면서 그 원인이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광고 규제에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왜 우리만 유독 광고 산업이 뒷걸음질을 치고 특히 방송광고 시장이 큰 타격을 받고 있는가를 따져 보면 보장판매가 없는 제도와 요금제도와 무관치 않다”고 말했다. 현재는 광고 효과에 대한 보장이 없는 일반광고판매 비중이 63%나 차지하는데, 광고 판매 방법을 개선하면 광고를 더 늘리는 게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제 2013년 9월 광고계 조사 결과를 보면 보장판매를 늘리면 광고를 더 구매할 것이냐는 물음에 광고주의 83%가 ‘그렇다’고 응답했다.
박 교수는 방통위가 추진 중인 지상파 광고총량제 도입은 물론 중간광고 허용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단순히 ‘지상파 살찌우기’ 차원이 아니라 광고 효과를 높여 광고주들이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단계적으로는 유료방송의 광고 규제를 전면 폐지해야 한다”면서 “중소방송과 종교방송에 대한 ‘강제적 결합판매’도 폐지하고 다른 지원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