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우리는 ‘기레기’라는 부끄러운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반성하고 다짐했습니다. 기자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는 기자의 소명을 되뇌어야 하는 숙명적 존재인지 모르겠습니다. 기자협회보가 신년을 맞아 ‘기자는 00이다’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기자들은 ‘소금’, ‘징검다리’, ‘메신저’, ‘굳은살’, ‘사관’, ‘확성기’, ‘예보관’, ‘물음표’, ‘바보’란 말들로 기자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기자입니까.’ ‘어떤 기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2015년 새해를 맞아 기자들은 ‘기레기’라는 불신의 단어와 절연하고 기자 본연의 역할을 위해 치열하게 취재 현장을 지키겠습니다. -편집자
고생이다
공지영 경인일보 사회부 기자
지난해를 돌이켜보면 어느 때보다 몸과 마음이 고된 한해였습니다. ‘고생한다’는 말을 가장 많이 들었지만, 기사를 작성하는 스스로와 기사를 접하는 국민 모두에게 고생한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새해가 밝아도 마음은 무겁기만 합니다. 부디 올해는 우리가 고생한 만큼, 뜻깊은 결과로 대한민국이 함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소금이다
권영철 CBS 선임기자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내는 동시에 부패를 막는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이다. 사회에서 ‘기자’의 역할도 소금과 같다. 특히 음식의 맛을 돋우는 조미료의 역할보다는 부패를 감시하고 견제하는 방부제로서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 언론환경의 변화로 기자들의 존재가치가 점점 떨어져 가고 있지만 ‘비판과 감시’라는 기자 고유의 역할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기자들이여! 2015년에는 좀 더 짜고 순도 높은 ‘소금’이 되자.
독자와 공감하는 직업이다
김봉철 아주경제 정보과학부 기자
기자들이 ‘기레기’라는 비아냥을 듣는 이유는 독자와 소통,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독자가 알고 싶고, 궁금해 하는 기사를 쓰면 된다. 어려울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자.
역사(歷史)다
김선환 tbs 경제산업팀 기자
민주주의는 언론이 바로 섰을 때와 제 역할을 못할 때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를 역사적 사실을 통해 말해주고 있다. 글로써 일제치하 민족의 독립을 외쳤던 기자가 그랬고, 고 김주열 열사의 죽음이 알려진 것도 깨어 있는 기자의 역할이었다. 올해 우리는 아들, 딸, 조카와도 같은 소중한 생명 수백 명이 수장되는 현실 앞에서 무기력했다. 현재의 기자들은 선배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까. 또 미래세대는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내년부터는 더 두려워하며 살아야겠다.
징검다리다
김영필 서울경제신문 산업부 기자
기자는 독자와 세상을 연결시켜주는 다리다. 신문을 보는 이들이 제대로 판단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독자들이 알아야만 하는 내용을 중간에서 전달해줘야 한다. 기자가 징검다리가 돼 국민이 진실을 알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최근에는 SNS나 독립언론처럼 기존의 기자보다 더 단단한 징검다리가 생기고 있다. 기성 언론의 위기요 기자들의 위기이기도 하다.
오지랖퍼(오지랖+er)다
류란 SBS 시민사회부 기자
동료로서 기자는 매력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 숟가락 젓가락 개수 알아내기는 기본, 서로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관심이 지나칠 때가 있기 때문. 하지만 결국 ‘남 일’에 대한 높은 관심이야말로 취재의 시작이자 끝이 아니던가. 타인의 사연에 쉬이 감정이입해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 기자란 태평양 같은 오지랖으로 불의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대한민국을 나와바리로 둔 부녀회장쯤 되지 않을까?
메신저다
박상익 한국경제신문 문화스포츠부 기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발달로 누구나 자기 목소리를 내는 세상이 됐다. 예전엔 전문가와 독자 사이에 기자가 있었지만 글 쓰는 전문가들의 등장으로 이 경계는 무너졌다. 존재를 위협받는 세상에서 기자는 여전히 진실을 보도하는 충실한 전달자여야 한다. 이 전제를 지키는 한 기자는 세상에 필요한 직업이다. 반대로 이를 잃어버리면 기자는 더 이상 기자일 수 없다.
바보다
배주환 MBC 기획취재부 기자
어제는 교통 문제를 취재하다가도 오늘은 환경 문제를 다뤄야 하는 기자 생활. 매번 새로운 분야를 파악하려면 처음부터 바보처럼 묻고 또 묻는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이 분야에 대해서 내가 좀 안다’고 여기면 오히려 편견을 갖게 되거나 대충 취재하기 쉬운 것 같습니다. 백지 상태에서 하나 하나 진실에 접근해 나가는 사람이 기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서비스업이다
백경열 영남일보 사회부 기자
정책과 제도 등 각종 사안들을 국민들이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전달한다는 측면에서 서비스업과 같다고 생각한다. 언론이 제4부로 불릴 만큼 권력화 되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기자들이 권위의식을 내려놓고 낮은 자세로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위를 내려놓고 좋은 정보를 잘 전달하는 것. 기자의 역할은 서비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의심과 확인이다
유은상 경남도민일보 경제부장
정확하게 말하면 ‘기자의 기본은 의심과 확인이다’가 맞겠네요. 기자는 자신이 속한 회사에 따라 정치 성향과 뉴스 가치 판단이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의심과 확인은 공통기초입니다. 치열한 경쟁에서 의심은 과잉되지만 확인은 부족한 때입니다. 기레기라는 단어도 이러한 기본을 소홀히 여긴 탓에 생겨난 것이겠죠? 내가 얻는 정보가 정확한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재의심하고 또 확인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이 말을 꼽습니다.
물음표다
이주영 오마이뉴스 정치부 기자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말을 듣고, 하나의 기사로 만든 뒤 출고를 할 때마다 스스로 되묻곤 한다. ‘나는 얼마나 질문을 많이 던졌나’라고. 기자는 ‘물음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법은 없다. 모든 행위에는 으레 ‘왜?’가 따르기 마련. 기자는 독자에게 ‘왜’라는 궁금증을 기사로 해소해주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세상에 묻는다. “왜 그런 겁니까”라고.
내일(내 일)이다
이지효 중부매일 편집부 기자
‘내일’은 중의적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내일’은 다음날을 하루 먼저 사는 기자들의 역할, 내일을 먼저 내다보고 한발 더 앞서서 더 멀리 바라본다는 의미와 함께 ‘내 일’의 뜻도 포함하고 있다. 기자가 할 ‘내 일’이란 공공의 선과 국민의 알 권리 충족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일’을 게을리 해서도, 거짓되게 해서도 안 된다.
무지개다
임현우 농민신문 농정부 차장기자
기자들은 매일 사회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의 글로 삭막한 사회에 무지개처럼 생명감을 불어넣는다. 때로는 감성이 넘치는 글로, 때로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글로, 때로는 재치있는 글로 독자들과 희노애락을 함께한다. 무지개가 떠오르면 행운이 찾아올 것을 상상하듯 독자들도 다양한 기사 속에서 희망을 만나는 행운을 누려보길 기대한다.
장그래다
장혁진 중앙일보 사회2부 기자
가진 스펙이 없어도 현장에 뛰어든다. 복사용지조차 찾지 못하고 허둥대는 인턴사원처럼, 나는 이제 겨우 2년차 막내기자일 뿐이다. 내년에는 바둑판같은 세상에서 송곳같은 질문을 한 수 던질 수 있을까. 부족한 지식과 경험에도 ‘꿋꿋이 버틴다’는 삶의 야마를 찾아낸 장그래처럼, 2015년 을미년에는 부디 기자로서 완생(完生)하기를.
처음처럼이다
전병남 TV조선 사회부 기자
2014년, 많은 사건이 있었죠. ‘세월호 참사·유병언 일가 비리’부터 ‘통진당 해산’까지…. 사건이 사건을 덮은 한 해였습니다. 2015년도 많은 뉴스가 쏟아지고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치열하게 팩트를 찾아 정확하게 보도하는, 기자 본연의 자세가 더욱 중요하겠죠. ‘처음처럼’ 초심(初心)을 잃지 않고 기자로서 최선을 다하는 한 해를 보내겠습니다.
건설 엔지니어다
정석우 매일경제 금융부 기자
건축물의 3대 요소가 품질과 공기(工期), 안전이듯 기사 역시 참신성과 마감, 진실성을 준수해야 한다. 최근 참신성(품질)과 마감(공기)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진실성(안전)을 도외시하는 기사가 늘어나는 것 같다. 건설에서 안전이 그러하듯 기사 역시 진실성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
사관이다
최민영 경향신문 미디어기획팀장
권력의 옆에 있으면서도 권력의 편이 아니었으며, 붓은 과거를 적으면서도 눈은 미래를 향하고 있었다. 저널리즘 콘텐츠의 유통 플랫폼이 디지털로 급격하게 이동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자의 근본적 역할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실록’이나 ‘일기’와 달리 왕궁이 아닌 더 넓은 세상을 관찰의 대상으로 하며, 대중이 읽고 이해하기 편한 방식으로 콘텐츠를 만든다는 세부적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자신의 이익만을 꾀해 붓을 휘두르는 사관이 있을 수 없듯이, 기자는 자신의 소명과 공익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다.
不可近 不可遠의 식구다
추인영 뉴시스 정치부 기자
기자는 출입처(혹은 취재원)와 불가근불가원의 식구다. 너무 가까우면 감성이 지나치게 작용하고, 너무 멀면 상황의 맥락을 몰라 부정확한 기사를 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그들과 살을 부대끼고 동고동락하는 식구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정들고, 또 이별을 반복하는 게 어쩌면 기자의 숙명인 듯. 하지만 절대 익숙해지는 과정은 아니다. 기자도 사람이니까.
굳은살이다
홍주예 YTN 전국부 기자
오른쪽 셋째 손가락 끝마디, 펜이 맞닿는 부분을 만져본다. 굳은살은 사라진 지 오래다. 수습 때는 1~2주가 멀다 하고 새로 받아야 했던 취재수첩의 교체 주기도 길어졌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열심히 적던 초심은 어디로 간 걸까. 어느새 노트북 자판으로 보도 자료나 옮겨대는 게으른 기자가 돼 버린 모양이다. 올해는 단단한 굳은살로 다시 무장해야겠다. ‘지록위마’의 시대, 여기서 더 부끄러워지지 않으려면 섬섬옥수는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예보관이다
황현택 KBS 정치부 기자
초4 아들 녀석에게 물었다. 대뜸 ‘일기예보’라고 답한다. 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주잖아. 그런데 잘 안 믿잖아.” 음… 그럴 수도 있겠다. 한동안 ‘반성합니다’, ‘지키겠습니다’라며 고개를 많이 숙였다. 하지만 결국 ‘기레기’라는 손가락 저격을 당했다. 매체도 많고, 기자도 참 많다. 괴물 ‘아르고스’는 100개의 눈을 가졌단다. 그 많은 눈이 ‘See’만 하면 쓸모 없다. ‘Watchdog’(감시견)까지는 아니더라도 뉴스 보고 “다 뻥이야”라는 말 안 듣게 부릅떴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