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Z EZViwe

권력의 반격, 소송에 시달리는 기자들

명예훼손 유무보다 보도 위축 노려
"소송에 시간 빼앗겨 아무 일 못해"
미국 20개주 전략적 봉쇄소송 규제
형법상 명예훼손죄 폐지 목소리

김희영 기자  2014.12.10 13:41:23

기사프린트

언론을 겨냥한 청와대 등 고위공직자의 명예훼손 소송이 계속되고 있다. ‘정윤회 문건’과 관련된 보도만으로 불과 열흘 사이에 청와대 비서실장과 핵심 비서관들이 기자들을 잇따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국가는 원칙적으로 명예훼손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례에도 불구하고 명예훼손으로 인한 민·형사 소송은 ‘권력의 무기’로 자리 잡은 셈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 9일 “청와대가 아니라 ‘고소대(告訴臺)’”라며 “청와대 진돗개 이야기만 해도 소송을 당할까봐 우려스럽다”고 일갈했다.


청와대 등 고위공직자로부터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 기자들은 “권력 비판을 유보하고, 언론의 기능을 위축시키고, 취재원을 색출하기 위한 의도”일 뿐, 보도로 인한 실질적 손해를 배상받으려는 목적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저에게 왜 소송을 걸었는지 역취재를 해봤습니다. 고소인과 동급의 취재원에게 물어본 결과, 돌아오는 대답이 황당했어요. 보도의 어떤 부분이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고, 어떤 물질적·심적 피해를 입었는지 법적 논리가 맞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소인은 ‘고위관계자가 화가 나서 어쩔 수가 없었다’고 답했다는 겁니다.”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명예훼손으로 인한 손해배상 소송을 당했던 A언론사 B기자의 말이다. 그는 후속 취재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회사 내부에서도 ‘끝까지 취재하자’는 입장과 ‘타협하자’는 입장이 부딪힌다. 그러다보면 중요한 기사에 대한 게이트키핑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명예훼손 소송에서 정부와 공직자에 대한 언론의 비판기능을 폭넓게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최근 검찰에 사이버 명예훼손 전담팀이 설치돼 현 정권과 관련된 발언과 보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행태는 국제적 흐름에도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50개 주 가운데 20여개 주에서 전략적 봉쇄소송 규제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단순히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소송을 ‘전략적 봉쇄소송’으로 규정하고, 당사자의 특별 신청에 따라 법원이 소를 조기에 각하하는 제도다. 


청와대 관계자와 민·형사 소송을 진행 중인 C언론사 D기자는 “민사든 형사든 소송을 당하면 발목을 잡혀 다른 일을 못한다”며 “승소하려면 철저히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 취재보다 소송에 대응하는 게 훨씬 공이 들어간다. 취재원을 알아내려는 고소인의 작전에 말려들지 않으면서 대응하는 점도 어렵다”고 했다.


특히 형법상 명예훼손죄는 유럽인권재판소, 아티클19 등 국제인권기구들이 매년 폐지를 권고하는 조항이다. 명예훼손은 당사자 간의 문제일 뿐 국가가 개입해 처벌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논리다. 다수 신문사의 법률자문을 맡고 있는 한 변호사는 “검찰 수사라는 말만으로도 당사자(기자)는 불안감에 빠지고 후유증이 오래간다”며 “일련의 문제점들이 바로 권력자들이 추구하는 소송의 효과”라고 말했다.


지난 2011년 유엔인권위원회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반논평 34호’에서 “모든 당사국은 명예훼손의 비형사화를 고려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선진국 중 형법상 명예훼손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는 미국(15개 주)과 독일 등인데, 독일은 유죄 대부분이 벌금형에 그치며 미국은 실제 수사에 이르는 경우가 연간 2~3건에 불과해 제도의 실효성이 낮다.


우리나라에서도 형법상 명예훼손죄(제307조)와 모욕죄(제311조)에 대한 개정이 논의되고 있으나 뚜렷한 진전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공통적 내용은 △사실 적시에 대한 명예훼손죄 폐지 △허위사실 적시의 경우 ‘허위의 사실임을 알고도 적시해 타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경우’로 제한 △친고죄 조항 신설 △모욕죄 폐지 등이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 2012년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 처벌 조항을 삭제하고, 공익적 사안에 대해서는 위법성을 조각하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참여연대도 2012년 이 같은 내용의 입법청원을 한 데 이어 지난해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친고죄 신설’ 내용을 강화한 개정안을 발의했다. 현재 명예훼손죄는 피해자의 고소가 없이도 수사가 가능한 ‘반의사 불벌죄’이기 때문에 검찰의 무리한 수사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의된 개정안들은 현재 모두 국회에 계류 중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명예훼손 소송은 일반시민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순기능도 있지만 역기능이 너무 강하다. 권력자가 검찰을 동원해 비판세력을 탄압하는 법적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며 “유신헌법 비판을 막기 위해 ‘유언비어 유포죄’를 만들었던 긴급조치 1호가 떠오른다”고 말했다.